박물관에서는 2

왕들의 교과서, 경직도耕織圖
국립민속박물관&일본역사민속박물관

제4차 한일학술교류 사업

글 조수현(민속연구과 학예연구사)

왕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우는 경직도
경직도耕織圖는 봄·여름·가을·겨울 농민들의 한 해 살이를 그려낸 그림이다. 누가, 왜 이런 그림을 제작했을까?
남송대 화가 누숙樓璹, 1090~1162이 송 고종에게 바친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를 기원으로 하는 이 그림은 처음에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점차 군주와 왕자들이 본보기로 삼아 교훈을 얻는 용도로 제작되었다. 경직도가 한국에 전래되면서 이러한 기능은 조선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조선시대 숙종은 열 살이었던 세자(훗날 경종)가 백성의 어려움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경직도 제작을 명했으며, 영조 대에는 신하들이 세자 교육 기관인 춘방春坊에 보관된 낡은 농상도(즉 경직도)를 새로 그리자고 건의한 기록도 있다.
궁궐 안에서 성장해 백성들의 실제 삶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왕자와 왕손들에게, 경직도는 농민들의 힘겨운 일상을 시각적으로 전해줌으로써 통치자로서 지녀야 할 책임과 의무를 일깨우는 교훈이 되었다.

필자미상, <경직도 10폭 병풍> 부분, 시대미상, 국립민속박물관

백성들도 사랑한 경직도
왕실과 일부 신하들에게 감계鑑戒의 목적으로 제작·소비되었던 경직도는 후대로 갈수록 점차 민간의 수요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한산거사寒山居士가 지은 「한양가漢陽歌」에는 광통교 아래 서화 판매점에서 경직도가 판매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광통교 아래의 가게에 각색 그림이 걸렸구나.
보기 좋은 屛風次에 百子圖, 瑤池宴, 郭汾陽行樂圖며
강남 금릉의 耕織圖며 한가한 瀟湘八景 산수도
기이하다…
<한양가> 중 일부

민간으로 확산된 경직도에는 기존의 왕실 경직도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조선 고유의 풍속과 생활의 모습들이 다채롭게 반영되었다. 단순히 농경과 잠직 장면이 조선식으로 변용된 것에 그치지 않고, 정월 달맞이, 볏가리대, 두레 농악, 농한기의 여가(돈치기·투전), 소싸움, 잠자리 잡기, 사냥, 초가 이엉 교체 등과 같은 풍속 장면들이 새롭게 더해졌다.

이한철, <세시풍속도> 부분, 19세기.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필자미상, <경직도 10폭 병풍> 부분, 시대미상, 국립민속박물관

해양 민속에 이어 이번에는 농경 문화
한국의 국립민속박물관과 일본의 역사민속박물관은 2003년부터 공동연구, 전시 협력, 연구자 교류, 학술 정보와 간행물 교환 등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협력을 지속해 왔다. 양국 박물관은 제4차 한일학술교류사업2024~2027의 주제로 ‘경직도耕織圖’를 선정했다. 제3차 교류 사업에서 ‘해양 민속’을 다룬 데 이어, 이번에는 ‘농경 문화’를 비교하자는 취지였다.경직도는 벼농사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 전해지면서 각국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용되었다. 전래 초기에 중국 경직도의 도상을 그대로 따르던 한국과 일본의 경직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각국의 풍속과 현실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경직도는 양국에서 공통적으로 유행한 그림이면서도 각 나라의 농경 풍속을 반영하고 있어, 비교 연구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양국 박물관은 5명씩 총 10명으로 구성된 공동 연구팀을 꾸렸고, 연구를 진행하면서 필요에 따라 외부 연구자를 추가 위촉하기로 했다. 연구팀은 미술사, 역사, 농경 민속, 복식, 건축, 여성 민속 등 다양한 관점에서 경직도를 분석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그림과 현실을 비교하기 위한 공동 조사
그림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최초로 전래된 중국 경직도의 도상을 기초로, 작가의 경험과 선택, 주문자의 취향, 국가의 문화적 현실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 최종적으로는 작가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이에 따라 조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그림 자체에 대한 조사였고, 다른 하나는 경직도에 나타난 농경 현장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 1년 차인 2024년에는 한국과 일본 박물관에 소장된 경직도를 대상으로 공동 조사가 이루어졌다. 양국의 회화 작품 DB 구축 상황을 고려하여, 이번 조사에서는 아직 데이터베이스화되지 않은 경직도를 우선적으로 선정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직도 23점과 일본의 경직도 19점, 총 42점을 양국 연구자들이 함께 실견하고 토론했다. 특히 연구진들이 그림을 함께 보며 검토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 그동안 간과했던 장면들의 특징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2025년에는 경직도에 묘사된 농경 현장을 직접 살펴보며, 그림 속에 표현된 농경 민속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조사했다. 한국에서는 홍천의 겨리농경문화, 원주 매지농악, 안동포 짜기, 경주 명주 짜기, 경주 양동마을 등을 조사했고, 일본에서는 다자이후 텐만궁의 전통 모내기 의례, 구루메 가스리 공방의 전통 염색 및 직조 과정, 니이카와타고모리新川田篭 지역의 전통 건조물과 마을 등을 조사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양국의 경직도
한국과 일본의 경직도는 사계절의 변화를 배경으로 각국의 풍속과 현실을 반영해 농경과 잠직 장면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후대로 갈수록 지역 현실을 반영한 풍속 장면이 다수 첨가되고, 왕실 중심의 수요에서 민간 소비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세부 장면과 형식에서는 차이가 있다. 형식적으로 한국의 경직도가 대체로 병풍 형식으로 한 폭에 농경과 잠직 장면이 함께 그려졌던 반면, 일본은 경작도와 양잠도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제작되었다. 사계경작도가 주로 남성의 공간에서 후스마를 장식하는 형태로 제작된 데 비해, 양잠도는 우키요에浮世絵 형식으로 제작되어 보다 대중적으로 소비되었다는 점도 한국과 다르다.
일본은 서민층 사이에서 농사 장면을 그린 에마絵馬를 사찰에 봉납하는 풍습이 정착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각국의 풍속 장면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한국 경직도의 경우 정월 달맞이, 볏가리대, 두레 농악, 농한기 여가(돈치기·투전), 소싸움, 잠자리 잡기, 사냥, 초가 이엉 교체와 같은 조선 특유의 풍속이 삽입된다. 일본 경직도에서는 지역 축제와 결합한 ‘모내기 축제祭りの田植え’ 장면이 대표적이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의 에도 중기 <사계 농경도 병풍>에서도 봄의 모내기와 가을의 수확이 쌍을 이루며, 논 갈기代かき, 에부리질エブリつき, 모다발 들기苗持ち, 모내기田植え, 반주囃し, 점심을 나르는 여성과 아이들이 체계적으로 배열되어, 노동·의례·유희가 어우러진 일본 농경 풍속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더 자세한 조사 내용이 궁금하다면,
11월 7일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오세요

그동안의 조사 과정과 중간 성과는 11월 7일 국립민속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리는 ‘제4차 한일학술교류 국제학술대회’에서 공개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조사에 참여한 한·일 연구진이 그간의 조사 과정과 중간 결과를 공유할 예정이다.
또한 2025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하여, 한일 학술교류 사업과 비교 민속 연구의 성과 및 향후 전망을 주제로 한 초청 강연도 진행된다. 제4차 한일학술교류 사업은 2026년 최종 결과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며, 2027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공동 전시를 개최할 계획이다.

제4차 한일학술교류 국제학술대회 일정

민속소식 제312호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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