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장식(길문화연구소장)
독창적인 이론으로 우리 문화의 이해를 더하다
한 학자를 평가할 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는 ‘연구 분야의 설說을 입론立論한 학자’가 아닐까 한다. 학설은 남의 이론과 변별되고, 특정 영역을 해석할 수 있는 독점적 틀을 갖춘 체계이다. 학설을 정립하는 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사고가 필요하고 다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우리 학계의 일부는 외국 학자의 이론은 빨리 받아들이지만, 우리 학자의 학설을 인용하는 데에는 주저하기 일쑤다. 자존적 인식이 결여되어서일까, 아니면 외국 학자의 이름이 주는 낯선 권위와 이미지 때문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외국 학자의 이론이나 학설은 우리 학문에 매우 가까이 있다.
남강南剛 김태곤金泰坤 선생은 1936년에 출생하고 1996년에 타계한 짧은 삶을 산 학자이다. 김태곤 선생은 문학도로서 일간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종합지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학자의 길로 진로를 바꿔 이름값을 드높인 민속학자요 국문학자이다. 34권의 저서와 173편에 달하는 논문을 남겼다. 연구성과를 일별하면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에 대한 업적1이 적잖음에도 민속학자로서 한 획을 그었다. 특히 무속에서 찾은 ‘원본Arche-Pattern’ 또는 원본사고原本思考는 한국민속 전반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민간사고의 본本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여 우리 문화의 심연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기도 했다. ‘모든 존재는 미분성未分性을 바탕으로 서로 순환하면서 영구히 지속한다.’는 독창적인 이론이다.2 
일찍이 M.엘리아데가 원형론原型論에서 존재 근원을 신神으로 상정한 데 대해 반론의 성격을 지닌 남강의 원본은, 신 이전 무공간·무시간의 카오스chaos를 만물의 존재 근원으로 보는 존재 사고 개념이다. 그리고 무속에서 행해지는 각종 제의는 자기 존재의 영구지속을 위한 원본사고의 표출이라고 이해했다. M.엘리아데의 Archetype과 C. G. 융의 Archetyus와는 변별된다는 뜻에서 남강 김태곤 선생은 아키패턴Arche-Pattern 이라는 조어造語를 창출하여 독창적인 ‘원본사고’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서구 이론 중심에서 우리 문화 중심의 이론이 비로소 입론된 것이다.3
그렇기에 남강 김태곤 선생은 학자로서 명예를 얻는 데 성공했고 그의 업적은 연구사에 길이 남았다. 또 주목할 것은 한국민속학은 민속을 통해 한민족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삶의 양식과 방법, 그리고 삶의 의미와 원리를 찾아야 하고 나아가서는 민족이 가야 할 삶의 미래적 지표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한국민속학의 원론적 접근론이고 궁극적 과제라 할 수 있는데, 그러므로 한국민속학은 한민족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소 당연한 주장일지 모르나 민속학의 위상이 그다지 높지 않았고 주변 학문으로 인식되던 시절에는 해처럼 빛나는 가치를 지닌 테제Theses이기도 했다.
남강은 주장·주의에 그치지 않고 삶의 현장을 찾아가 삶의 표현으로 형상화된 민속을 철저히 조사한 학자이기도 하다. 앎과 실천의 통합을 이룬 지행합일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무가집』 4권1971ㆍ1973ㆍ1979과 『한국무속연구』1981, 『한국무속도록』1982 등으로 출간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4
1. 최운식, 「고전문학 연구의 성과와 의의」, 「남강 김태곤의 생애와 학문세계 조명」, 민속원, 2007, 117-134쪽.
2. 김명자, 「남강 김태곤 교수의 생애와 민속학연구 성과」, 「남강 김태곤의 생애와 학문세계 조명」, 민속원, 2007, 32-53쪽.
3. 김기덕, 「김태곤 ‘원본사고’ 개념의 이해와 의의」, 「남강 김태곤의 생애와 학문세계 조명」, 민속원, 2007, 137-145쪽.
4. 홍태한, 「남강 선생의 무속 연구 성과와 의의」, 「남강 김태곤의 생애와 학문세계 조명」, 민속원, 2007, 77-96쪽.

심청굿을 연행하는 무녀 이금옥 옆에 앉아서 녹음을 하고 있는
남강 김태곤 선생_ 『한국문화의 원본을 찾아서 –무속의 현장』(2014)
민속-아키비스트라는 이름으로 수집한 자료는 박물관의 유물이 되다
그동안 민속학은 하나의 학문 분과지만 이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인류학, 역사학, 국문학과 같은 인문학의 인접 학문 정도로 인식해왔다. 민속학은 사라져가는 문화나 잔존문화를 연구하는 낡은 학문으로 치부됐다. 이는 민속학의 시작이 한편으로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배의 논리 개발을 위한 복무 경력이 있는 탓이기도 하다. 남강 김태곤 선생은 이 점을 주시하면서 이미 1971년에 일제가 실시한 조선 민간신앙자료조사의 문제점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무속현장을 중심으로 한국민속학의 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조사연구의 지평을 다졌다. 이와 더불어 구비문학이 중심을 이루던 민속학 초창기에 사회민속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도시민속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남강 선생의 선구적이고 진취적인 학문성을 엿볼 수 있는 연구 경향이 아닐 수 없다.현장조사에 맥진驀進하면서 일상적으로 만나기 마련인 것이 민속자료이다. 그런데 민속자료는 학문 분과의 대상으로서 가치는 물론 문화적 가치마저 폄하되어 왔다. 어쩌면 수집할 가치도 없고 보존할 필요가 없는 자료였을 것이다. 남강은 이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민속유물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동학同學들마저 무신도, 무구와 같은 자료를 모으고, 이들을 촬영하고 녹음하는 데에 대해 마뜩지 않은 시선과 함께 일종의 수집벽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흔히 무속에서 종교적 직능을 마친 무당은 무구巫具들을 묻거나 불태우기 일쑤이다. 무당이 무업巫業을 그만두어야 할 상황이 생길 때, 무신도와 무복을 태워 보내고, 쇠붙이 무구들은 땅에 파묻었다. 민속자료들이 저절로 소멸되는 셈이다. 남강 선생은 무속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들을 설득하여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사실 종교적 관행을 깨고 유물을 학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남강은 집념에 가까운 의지로 설득하고 이를 수습했다. 때로는 무당과 ‘수양 엄마’나 ‘수양 누이’의 연을 맺어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 무당을 수차례 방문하여 이른바 라포rapport를 형성하여 마침내 소중한 무속자료를 수합했다.
1971년 주간경향 8월호 인터뷰 자료에 12년간 모은 자료의 점수가 소개되어 있다. 무복 208점, 무구 311점, 무신위巫神位 107점, 무신도 213점이라 했으니, 양도 방대하지만, 민속유물을 바라보는 혜안도 대단하다. 남강이 작고한 1996년까지의 수집자료를 합계한다면 그 양은 더욱 방대하다.
일찍이 남강은 원광대학교에 재직할 때 박물관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원광대박물관의 내실을 꾀하기 위해 유물 수집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박물관장으로 재임하던 1978년 3월 1일에 수집 유물 중 무구와 무신도 562점을 흔쾌히 기증했다.

삼국지연의도 《장장군의석엄안(張將軍義釋嚴顔)》을
보존처리하여 전시하고 도록에 수록한 결과물;
『유물보존총서Ⅶ_삼국지연의도』(2016)
또 경희대학교에 재직 당시, 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경희대박물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시베리아관’을 준비하고 개관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몽골, 야크츠크 등 국외 자료 474점을 수집해 시베리아관의 충실을 꾀했다. 이보다 이른 1976년에도 원광대 박물관에 국내 무속자료를 기증한 바 있으니 남강의 박물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남강 김태곤 선생이 애초부터 꾸었던 꿈 중의 하나는 ‘무속박물관’이다. 소멸해 가는 자료를 한데 모아 연구에 매진하고 전시를 통해 우리 문화의 본디 모습을 알리려는 장대한 꿈을 기획했다. 민속자료를 기록하고 수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일찍 타계한 탓에 장대한 꿈은 스러졌지만, 남강의 35년간의 생각과 노력의 결과물은 부인 손장연 여사의 기증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수증됐다. 기증 자료는 아카이브 자료와 유물자료로 나뉘는데, 아카이브 자료는 총 1,883건 30,198점이고, 유물 자료는 1,368건 1,544점이다.5 국립민속박물관은 기증 자료를 연구하여 《민속학자 김태곤이 본 한국무속》2015. 4. 22.-6. 22.과 《신이 된 관우 그리고 삼국지연의도》2016. 4. 29.-7. 4. 등 두 차례 전시를 개최했고, 『한국문화의 원본을 찾아서-신령의 유물』2014, 『한국문화의 원본을 찾아서–무속의 현장』2014, 『유물보존총서Ⅶ_삼국지연의도』2016를 간행해 전시 도록보다 더 알찬 연구성과와 함께 ‘민속-아키비스트Folk-Archivist’의 빛나는 이름을 널리 알렸다.
5. 장장식, 「남강(南剛) 김태곤 수집자료의 기증 경위」, 「한국 문화의 원본을 찾아서 -무속의 현장」, 국립민속박물관, 2014, 8쪽.

제상을 기록한 김태곤의 조사노트 /브웨곰의 북(Vuegom’s drums)을 조사한 김태곤의 조사노트
하늘은 녹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는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하늘은 녹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天不生無祿之人),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地不長無名之草).”고 했다. 이 말이 허언이 아님을 남강 김태곤 선생은 학평學平을 통해 보여주었다.
치열한 열정으로 아키비스트의 삶을 살며, 이름 없는 영역인 무속에 이름을 불러 주었고, 원본사고라는 이론을 세워 마침내 영원히 잊히지 않는 의미를 남겼다. 그야말로 이름값에 부응하는 올올한 학자로서 책무를 다했고, 멸실에 처한 유물을 수집하고 사진으로 남기면서 민속-아키비스트로서 짧은 생애를 살았다. 비록 이른 타계이지만 두보杜甫의 시구처럼 “그러니 애달파 할 것이 없다.” 남강의 이름은 여전히 학계의 산령山嶺으로서 자리 잡고 있고, 그 봉우리를 등정할 또 다른 학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속소식 제312호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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