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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의 즐거움 | 참고누

먼 옛날부터 이어온 오래된 미래의 판놀이, 참고누의 탁월한 + 유산성

고누는 철저하게 운Alea의 요소를 없애고 알고리즘algorithm으로 무장한 추상전략 게임이다. 하지만 바둑과 감히 견줄 수 없고 장기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 그저 추상전략 게임이라는 판놀이Board games의 하나로서 이름을 내밀 뿐이다. 그래서인지 상대에게 승부를 청할 때에도 격이 다른 어법을 쓴다. 바둑은 “한 수 두십시다.” 하는 데 비해 장기는 “한 판 두세.”이고, 고누는 “한 판 두자.”고 한다. 바둑과 장기와 달리 고누가 고누다운 것은 ‘한 판 두자’는 즉흥적인 현장성에 있고, 별도의 도구와 기물을 갖추지 않아도 놀이가 가능하다는 수월성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누는 땅바닥에 말밭을 그리기만 하면 가능하다. 만약 종이가 있으면 그 위에 그려도 좋고, 혼날 용기가 있다면 마룻바닥도 좋다. 안방의 장롱 서랍을 꺼내어 엎어놓고 밑바닥에 말밭을 그리면 그것 또한 제격이다. 말game pieces, tokens이야 사금파리나 돌멩이, 나뭇가지나 풀잎도 좋다.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듯이 고누 역시 제값을 하려는 듯 일찍이 이름을 기록으로 남겼다. 임춘은 『공방전』12세기 중후반에서 고누를 ‘格五격오’라 표기했고, 이가환은 『물보物譜1802 「박희」 항목에서 ‘格五우물고노’라 적었다. 조재삼은 『송남잡지』1855에서 ‘우물고누井困五’라 썼고, 권용정은 『한양세시기』1849에서 ‘高壘고루’라 적었다. 그런데 ‘고노’나 ‘고누’는 무슨 뜻일까? ‘겨루다’의 뜻을 지닌 ‘고노다ㆍ꼬노다/꼬누다’와 관련이 있으며, 어간 ‘고노ㆍ꼬노/꼬누’가 ‘고노ㆍ고누’가 되었다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우리말 어휘론에서 동사의 어간이 독립되어 명사로 쓰인 적이 없다. 동사가 명사가 되려면 ‘-기, -ㅁ(음)’과 같은 명사형 전성어미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고노+다’에서 떨어져 나온 ‘고노’가 놀이명이 되었다는 이 설명을 어찌 지지해야 할까? 어쩌면 고누를 ‘格五’라 표기한 데서 고누의 어원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고누 중의 고누, 참-고누의 놀이방법
고누는 땅바닥에 말밭을 그려 놓고 말길을 막거나 상대말을 많이 따는 것을 겨루는 놀이이다. 유만공이 『세시풍요』1843년에서 고누를 일러 ‘지기地棋’라 한 것은 고누가 기본적으로 땅바닥에서 노는 놀이, 곧 ‘땅바둑’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고누의 종류는 20여 가지인데, 옛 모습 그대로 이어져 온 고누는 10여 가지이다. 놀이 운용 방식은 세 가지 패턴으로 나뉜다. 이를테면 ‘상대말의 길을 막기호박고누, 특정 방식으로 상대말을 따먹기패랭이고누, 길을 막고 특정방식을 취하여 상대말을 따먹기참고누’이다. 여러 고누 중 주목을 끄는 것은 ‘열두밭고누곤질고누’이다. 보통 ‘참고누’라 하여 참붕어, 참꽃의 용례처럼 접두사 ‘참’을 붙여 ‘고누 중의 으뜸’이란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아마도 바둑처럼 임의의 칸에 말을 놓아 나간 다음 장기처럼 뜻대로 옮겨 다니면서 ‘꼰’을 만들어 상대말을 따먹는 복합적인 상황에 대처하여 고도의 전략을 쏟아야 하는, 놀이말의 세팅 방식과 운용방법이 특별한 놀이라는 점이 강조된 이름이 아닌가 한다. 참고누는 대중소의 사각형 3개가 동심사각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변의 중앙 상하ㆍ좌우와 꼭짓점이 서로 연락되어 있다. 선과 선의 연결로 교차점이 24개이고, 두 사람이 12개의 목을 차지한다는 뜻에서 ‘열두밭고누’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놀이하는 사람은 흑백黑白이나 청백靑白 등 서로를 구별할 수 있는 말 12개씩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선후를 가려 시작하되 “임의의 칸에 말 놓기”와 “놓인 말을 옮기기”의 두 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가로와 세로, 대각선의 목에 말을 놓되 3개의 말이 일직선으로 놓이게끔 전략적으로 놓아야 한다. 물론 상대방이 세 개를 만들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말이다. 만약 세 개가 일직선이 되면 “꼰이야!”하고 외치며, 상대방 말 하나를 떼어낼 수 있다. 떼어낸 자리에는 말을 놓지 못한다. 12개의 말을 모두 놓으면 두 번째 단계로 옮아간다. 빈 곳으로 한 칸씩 이동하되 3개가 일직선이 되도록 움직여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 말이 2개가 남으면 놀이가 끝난다.

 

유물과 문헌에 등장하는 참고누
지난 2019년 문화재청은 전북 진안군 도통리의 청자가마터를 사적 제551호로 지정하면서 가마터에서 수습한 도기편과 요도구窯道具 등을 선보였는데, 그 중 참고누가 새겨져 있는 갑발匣鉢 한 점이 위세를 떨치며 연구자의 주목을 끌었다. 갑발은 도자기를 구울 때 불길이 직접 닿지 않게 하고 재가 앉는 것을 막기 위해 청자를 덮는 도구이다. 바로 이 갑발의 바닥직경 19.5㎝에 참고누를 선명하게 새겼다. 일찍이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청자가마터10세기 초에서 수습한 갑발에서도 발견된 바 있는 바로 그 참고누이다. 이로써 고려 초에 ‘참고누’가 이미 있었고, 놀이용이든 의례용이든 간에 놀이판을 두루 향유했음이 분명하다. 이보다 앞서 경북 칠곡군 구덕리 소재 송림사 오층전탑국보 제189호에서도 참고누가 새겨진 전돌을 수습한 바 있다. 송림사는 진흥왕 5년544년에 전탑과 함께 세워졌고, 몽골 침입1235년과 왜의 침략1597년으로 불에 타고 몇 차례 중건되었던 절이다. 그러므로 오층전탑에서 수습된 ‘참고누 전돌’이 어느 시대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창건 당시에 만들었다는 확증만 있다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외에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수습된 참고누 유물로 만월대 전돌 3점과 기와편 1점, 제주 항파두리성 발굴 석재1271~1273년 등을 꼽을 수 있다. 연해주의 크라스키노Kraskino 발해 성터에서도 고누판9세기 초을 발굴한 바 있지만 지면상 논외로 한다면 고려 시대의 고누야말로 정말 인기 있는 놀이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회화 작품에 등장하는 첫 고누판은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에 묘사된 ‘우물고누’이다. <태평성시도> 제 5폭에 ‘바둑ㆍ윷놀이ㆍ고누’가 높낮이를 달리하여 위계적으로 그려져 있다. 바둑과 윷놀이는 방안에서, 우물고누는 마당에서 하고 있다. 우연한 배치였을 테지만 놀이의 면면이 잘 드러나는 화면이다. 고누의 구체적인 놀이판을 수록한 첫 문헌은 스튜어트 컬린의 『한국의 놀이』1895년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전승하고 있는 ‘우물고노, 네밧고누, 오밧고노, 곤질’의 놀이판과 함께 간단한 설명을 붙였다. 오늘날의 말밭과 비교할 때, 전혀 차이가 없다. 곤질은 곤질고누, 곧 참고누를 가리키니, 참고누보다 곤질고누이 오래된 이름인 셈이다.

<한여름 밤의 꿈>에 등장하는 참고누
참고누는 전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는 보편적인 놀이이다. 중국은 물론 몽골에서도 전승되고 있고, 유럽에서는 ‘방앗간Mills Game, 메렐Merelles, 나인 멘스 모리스Nine Men’s Morris’ 등으로 불린다. 러시아에서는 ‘맬니차Мельница’라 하는데, 유럽의 ‘방앗간, 제분소’를 뜻하는 ‘Mill’과 같은 말이다. 9개의 놀이말로 시작하되 3개의 말로 ‘밀Mill’을 만들며우리는 ‘꼰’을 만든다, 그럴 때마다 상대말을 떼어낸다. 때로는 우리나라처럼 12개의 말로 놀기도 한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모라바라바Morabaraba라는 이름의 12개 놀이말을 쓰는 참고누를 즐긴다. 일찍이 미케네 문명의 유적에서 출토된 나인 멘스 모리스가 새겨진 점토판그리스 고고학박물관 소장은 유럽권의 참고누가 아주 오래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참고누가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또는 로마 제국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하나 아직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중세 영국에서는 인기가 최절정에 달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강물은 범람하고 육지는 물바다가 됐죠. 이 때문에 소들은 헛되이 멍에를 지고, …중략… 나인 멘스 모리스는 진흙으로 덮여 버렸네.”

인용문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1600년 2막 1장의 한 대사이다. 요정의 왕비인 티타니아Titania가 요정의 왕인 오베론Oberon과 다투면서 쏘아붙이는 말이다. 이런 참고누를 셰익스피어가 작품에 등장시킬 정도였으니 얼마나 유명한 놀이였던가를 새삼 알 수 있다. 이처럼 참고누판은 우리나라와 동양을 넘어 동유럽, 고대의 근동 및 지중해 연안의 문화권에서 두루 발견되는데, 이것이 ‘놀이판’이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고 문양으로 본 아리엘 골란은 바빌론 기호, 바빌론 문양이라 이름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참고누 도판이 의례와 놀이의 경계에 선 것임을 간파한 것이고 그것이 지닌 상징의 모호성과 정형성에 주목하여 ‘바빌론 기호’라 이름 붙인 것은 신의 한 수인 것 같다.

터키에서 찾은 주두柱頭에 새겨진 참고누
지난 2019년 터키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이스탄불 소재 모자이크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는데, 뜨락의 한 켠에 석부재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주춧돌에 윷판이 나오는 우리나라의 사례를 봤던 터라 저절로 석재에 눈길이 쏠렸고, 부재部材 하나하나를 살피기에 이르렀다. 무의식적이었지만 마침내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 대접받침柱頭 중앙에 나인 멘스 모리스가 선명한 자태로 덩그렇게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박물관 관계자를 만나 물었으나 도판의 의미는커녕 석부재의 출처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앙카라의 작은 박물관에서 궁금증이 풀렸다. 나인 멘스 모리스와 투웰브 멘스 모리스를 새긴 목제 놀이판을 판매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어보니 아주 옛날부터 전해오는 놀이판이고, 지금도 즐긴다 했다. 나인 멘스 모리스의 터키 명칭은 ‘아홉 개의 돌Dokuz Taş’이고, 투웰브 멘스 모리스는 ‘열두 개의 돌On iki Taş’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리고 ‘아홉 개의 돌’에서는 대각선에서의 3개를 인정하지 않으며, 3개만 남았을 때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날아갈jump 수 있는 특전을 준다고 귀띔한다. 유럽의 놀이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이처럼 생각지 않은 곳에서 참고누가 세계인의 보편적인 전략놀이라는 점을 재확인하면서 먼 과거에서 이어온 오래된 미래의 보편적 무형유산으로서 탁월한 가치를 거듭 느끼는 순간이다.


글 | 장장식_문학박사, 길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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