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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개인의 일기日記, 역사歷史가 되다
고故 학호 박래욱 선생 일기

어린 시절,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그동안 밀린 방학 일기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의 하루는 매일매일 비슷한 일상이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소재를 찾느라 골머리가 아팠다. 밀린 일기를 쓰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바로 날씨였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 속에서 그날그날의 날씨를 기억하기란 너무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개학하기 직전 많은 어린이에게는 밀린 일기를 쓰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을 것이다. 매일매일 일기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1954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가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1954년부터 쓴 총 84권의 일기가 1997년 8월에 대한민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바로 학호 박래욱 선생의 일기이다.

금고 속 일기

기억은 기록되고 기록은 역사가 된다.
일기의 시작은 박래욱 선생 나이 10세 때인 1948년부터였다. 10살이 되던 해, 어머니께서 소년 10살이면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면서 일기를 쓰라고 권하셨다. 이 일을 계기로 박래욱 선생의 일기 인생은 시작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행복했던 어린 시절부터 6·25전쟁 당시 경찰이셨던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일, 뒤이어 어머니의 죽음까지 6·25전쟁을 몸으로 직접 겪었던 일들이 자세히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두 살배기 남동생과 함께 세상에 남겨진 박래욱 선생이 전쟁고아로서 힘겹게 보냈던 학창 시절, 결혼을 통한 새로운 인생살이, 화장품 외판원에서 한약사로의 인생 전환, 1남 2녀의 단란한 가정생활 등 개인의 인생 여정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상 속에서 겪었던 산업화와 민주화 시기의 내용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담겨 있다. 박래욱 선생의 일기에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이 일기를 통해 사회 현상과 개인의 삶이 어떻게 연관 지어질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한 개인의 하루하루 기억을 일기에 남김으로써 개인의 일상은 기록이 되고 일상과 생각의 기록은 개인의 역사가 된다. 일기는 한 사람의 인생이면서 한 개인의 역사이다. 또한 일기 속에는 개인적인 일상의 기록을 통한 역사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의 시대상과 사회상 그리고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이 담겨 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루도 거르지 않은 그의 일기 쓰기는 결국 박래욱 선생의 인생이 되었다.

 

박래욱 선생 일기,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다.
박래욱 선생은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40년 정도 되었을 무렵, 일기로 인해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당시에 그동안 써온 일기를 사진으로 찍어서 명함 뒷면에 넣어두었다가 테니스 동호회 회원과 명함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명함을 본 방송국 직원이 방송 출연을 권하였다. 그리하여 1996년 6월, 지역 방송에 출연하면서 일기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97년에는 한국기네스북 일기 최장 기록 보유자로 등재되기도 하였다.이런 과정에서 일기는 매우 유명해졌다. 사설 박물관과 대학박물관에서 기증을 권유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 일기에 대해 알게 된 국립민속박물관 직원들이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일기 기증을 권유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 직원들은 50년 이상 써온 일기가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개인이 보관하기보다는 국가에서 보관해야 보존 가치가 더 높아진다고 강조하였다. 여러 차례 대면을 한 끝에 박래욱 선생은 결국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2006년 11월 28일, 학호 박래욱 선생은 일기 98권1950~2005년을 비롯해서 금전출납부1961~2003년 10권, 처방전1971~2002년, 각종 영수증 등 총 14건의 자료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다.박물관에 일기를 기증하면서 2008년에는 기증유물들을 바탕으로 ‘내 삶의 감초, 55년간의 일기’ 기증전시를 열게 되었고, 또 박래욱 선생의 일기 인생을 구술조사하여 『기억, 기록, 인생이야기』라는 생애사 조사보고서도 발간하게 되었다.

 

박래욱 선생 인생 일기, 영원한 의미로 남다
일기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면서 한 개인의 역사이다. 또한 일기를 통한 기록은 한 개인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까지 엿볼 수 있는 역사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박래욱 선생 일기 또한 1년 365일의 날씨를 비롯해 다양한 정치적 사건들, 그리고 돼지고기 반 근이 100환, 목욕 50환, 영화 30환1956년 당시 등 상세한 생활 물가 기록들이 담겨 있어 사회, 경제, 정치 등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일기의 기록은 중요한 사회적 현상과 역사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 역사이기도 하다. 기록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기 자료의 집적으로 후대 사람들이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개인의 일생의례까지 분야별로 시대의 흐름을 연구할 수 있어 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박래욱 선생 일기는 2022년 4월 1일 그 기록을 멈췄다. 1954년 이후부터1954년 이전의 일기는 6·25전쟁 당시 일부가 불태워졌으나 남은 부분을 이용하여 ‘학호일기’라는 책자가 발간되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일기는 더 이상 그 기록을 남길 수 없게 되었다. 84년의 일기 인생은 2022년 끝이 났지만, 고인이 남긴 일기는 개인의 역사를 넘어 시대의 역사가 되고 우리 모두의 역사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활용되고 문화유산으로 전승될 것이라 확신한다.

본 글을 2008년 박래욱 선생님의 일기 기증과 연계하여 시행한 구술조사를 바탕으로 발간했던 『기억, 기록, 인생이야기』 속 내용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박래욱 선생님은 늘 그러셨던 것처럼 아직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감초당한약방에 나가서 일기를 쓰실 것만 같습니다. 이제는 그 일기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박물관에 기증하신 박래욱 선생님의 일기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글 | 최명림_어린이박물관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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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장윤우 댓글:

    대단한 기록물이자 민간사에 남는 민초일화입니다- 저역시 긴세월에 걸친일기- 8,15해방과 6,25전쟁, 419혁명과 5,16군사혁명등으로 점철된 을 진솔하게 남겨오고 있습니다 이제 86세- 정축생. 소띠로 우여곡절과 희로애락- 얼마나 더 살아갈런지 모르게쓰나 개운(?)한 삶을 마감하게될 것 같습니다. 미술가로서, 시인으로서 교직 40년 인생사가 아련합니다. 13권의 개인시집, 산문집, 중학교 검정 미술교과서 중1, 중2,중3, 대학 교재등이 주마간산격으로 지나갑니다, 남긴다는사실에 감사하며 행복함임을 위의 일기첩을 통ㄹ해서도 확인합니다. 장윤우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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