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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 어린이 나막신

우리 아이 걸음마다 복이 한가득

부모가 자녀를 위해 복을 비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수단이 무엇이든 몇 번이고 빌고 또 빌어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흔히 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아이가 지니고 사용하는 것들에 정성을 담는 것이다. 전통 유물 가운데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의 간절한 염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어린이 복식服飾이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기까지 자녀에게 만복萬福이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그간 수집해온 자료들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가장 가깝게 이용된 의식주 유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의생활 유물은 입고 지녔던 이들의 상황적 배경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의복을 제작하는 방식에는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복을 비는 상징요소들이 드러난다. 특히 다양한 어린이옷과 장신구에는 아이의 무병장수無病長壽·부귀영화富貴榮華·자손번창子孫繁昌을 기원하는 소망을 곳곳에 표현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 용품을 준비하며 정성을 들인다. 아이를 감싸거나 업을 때 사용한 포대기는 염색하지 않은 흰색의 명주나 무명을 사용하는데, 동네의 장수한 노인이나 집안 어른의 옷을 뜯어 옷감으로 사용한다.1) ‘첫 아이 포대기와 기저귀는 친정에서 만들어 온다’라는 속설을 볼 때, 산모의 친정어머니 옷을 이용해 출산을 준비했을 가능성도 있다.

태어나 처음 입는 옷인 배냇저고리는 아이의 수명이 길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명실을 길게 꼬아 고름을 달았다. 또한 백일에는 아기의 발육이 큰 고비를 넘겼음을 축하하며, ‘백 살을 의미하는’ 백색의 저고리와 풍차바지를 백일옷으로 입혔다. 특별히 백 줄을 누비거나 백 개의 천 조각을 이어 붙여 장수長壽를 기원하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관3 ‘한국인의 일생’에서는 출생 의례 중에서도 제일 큰 의례인 첫돌 맞이 장면을 재현해 보여준다. 돌잡이2)를 하기 위해 돌상 앞에 선 두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은, 부모가 자녀의 생일을 축하하며 화려하게 지어 입힌 것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양한 색상과 길상문吉祥紋으로 치장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관3 <한국인의 일생> 중 ‘돌’

자손을 낳아 대를 잇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 자녀의 무탈을 기원하는 일은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로 여겨졌다. 또한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영유아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온갖 치성致誠을 드려 액운厄運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 했던 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무사히 지나 맞은 아이의 생일은 그 무엇보다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음 일 년을 건강하게 살아주길 바라며 복을 비는 날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나막신 중에는 신발 내부에 글씨가 적힌 것이 있다. 길이 15cm, 폭 5.5cm 정도의 나막신에는 두 짝 모두 발바닥이 닿는 면에 ‘생일기념 부귀生日記念 富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나막신의 사용자에 대한 정보는 정확히 남아있지 않지만, 신발의 크기로 미루어 보아 발 크기 12~13cm 정도의 한두 살 남짓 아이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이의 생일을 기념해 마련한 새 신으로 보이며, 아이의 두 발이 담기는 신발 안쪽에 복을 비는 마음을 함께 담았다. ‘부귀富貴’라는 글자에서 자녀가 재산을 풍족히 얻어 넉넉한 생활을 하고, 출세하여 귀한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인 의사이자 목판화가인 오자키 세이지尾崎誠治, 1893~1979가 1934년에 쓴 조선완구도보朝鮮玩具圖譜3)에는 조선의 나막신과 관련된 풍습이 쓰여 있다. 1929년 조선을 여행하며 장난감을 수집하던 오자키 세이지는 경성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당시 유행하던 화려하게 채색된 장난감 나막신을 샀다. 그때 가게에서 만난 노인이 말했다.

 

‘조선에서는 아이가 두 돌을 맞는 날 나막신을 신겨서 미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생일기념 부귀生日記念 富貴’라는 나막신에 써진 글귀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나막신에 글자를 적어 자녀를 향한 마음을 표현한 일은 19세기의 문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인 유신환兪莘煥, 1801~1859이 쓴 『봉서집鳳棲集4)에는 ‘어린아이 나막신에 새긴 명穉子屐銘, 치자극명’이라는 글이 있다.

‘着屨安 着屐危 與其安而放心也 寧危而自持’
가죽신을 신으면 편안하고, 나막신을 신으면 위태롭지.
그래도 편안하면서 방심하기보다는, 위태로우면서 조심하는 것이 나으니라.

유신환이 어린 아들의 나막신에 새겨 넣은 글귀로, 위태롭고 불편한 길을 걷더라도 안이한 생활을 경계하길 권하는 내용이다.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비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자녀가 바른길로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나막신5)은 주로 오동나무나 버드나무와 같이 단단하고 가벼운 것으로 만들었다. 견고하고 수명이 길다는 장점 때문에 신분이나 나이, 성별과 관계없이 널리 신었다. 흔히 비나 눈이 오는 날 신어, 발에 물이나 진흙이 튀어 들어가는 불편을 막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이들의 경우 마른 신6)으로도 즐겨 신었다. 장식이 없이 다소 투박한 어른용 나막신과는 달리 아이용 나막신에는 앞 축에 무늬를 새긴 것, 색을 칠해 꾸민 채극彩屐 등이 있다. 어른들이 날이 궂은날 신었던 굽이 높은 나막신과 달리 굽이 거의 없는 낮은 형태의 신이 많아 비교적 안전하다.

조선 후기 풍속 사진에서도 나막신을 신은 어린이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남녀 구분 없이 모두 신었으며, 앞서 언급했듯 아이들에게 나막신은 딱히 비 오는 날에만 신었던 신발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 아이들이 신은 나막신 안에는 또 어떤 복이 담겨 있을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꽃길만 걷자’라는 요즘 말이 있다. 신발은 걸음을 걸을 때 발을 보호하며, 의복의 차림새를 갖추어 꾸미는 것이다. 아이가 꽃길만 걷기를 바라며 신긴 어린이 신발은 자녀가 자라는 동안 순탄한 길을 가길,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지니고 살아가길 바라는 부모의 소망이 아닐까.

1)『고종실록(高宗實錄)』(1894)에는 ‘정조 임금이 순조가 탄생하였을 때, 나이 많은 사람의 옷을 가져다가 포대기를 만들라고 명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아이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장수한 어른의 옷을 이용한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돌상 위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여러 가지 물건을 놓고, 아이가 무엇을 잡는지에 따라 장래를 점쳐본다. 상위에 올리는 물건들은 다양하게 변했으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풍속이다.
3)의사이자 판화가인 오사카 세이지(尾崎誠治, 1893~1979)가 1929년 조선을 여행하며 수집한 전통 장난감의 실물을 목판화로 직접 그려 인쇄한 책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사용되던 전통 장난감의 실물과 사용법을 알 수 있다.
4)조선 후기의 학자 봉서 유신환(鳳棲 兪莘煥, 1801~1859)의 시문집이다. 유신환의 사후 1909년 김윤식(金允植)이 편찬한 것을 1913년 아들 대유(大有)가 간행하였다.
5)격지·목극(木屐)·각색(脚濇)·목리(木履)·목혜(木鞋)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기에 나막신으로 통칭하였는데,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다. 지방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6)진 땅에서 신는 신발인 ‘진신’에 대조되는 것으로 마른 땅에서 신는 신발을 말한다.


글 | 김은혜_국립민속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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