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PDF 박물관 바로가기

요즈음에는 | 추석 선물세트 변천사

코로나 시대, 우리의 첫 추석 나기

올해는 유독 빨리도 지나갔다. 작년 겨울 끝물에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해 꽃놀이도, 여름휴가도 포기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나 싶었더니 장마와 태풍이 지겹게 몰아쳤다. 한 것도 없이 내내 집에만 있었는데 벌써 9월이란다. ‘민족대명절’ 추석이 코앞이다. 그러나 올 명절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코로나와 장기간 이어진 장마와 태풍까지 겹친 탓이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불거진 코로나 재확산 사태에 명절 귀성길을 망설이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추석 선물 구매 경향도 바뀌고 있다.

선물 세트가 곧 ‘그때 그시절’
명절 선물세트는 늘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됐다. 선물세트라는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 1960년대에는 설탕과 조미료 등 서민 생필품이 인기를 끌었다. 이제 막 경제 성장을 시작한 때였던 만큼 다른 품목은 대량화가 어려운 때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치약이나 비누, 양말 등 공산품이 추가됐다. 커피 보급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인스턴트 커피세트 등이 큰 인기를 모았다. 1980~90년대 중반까지는 경제 호황 분위기가 고스란히 반영됐다. 스카프, 넥타이 등 좀 더 고급스러운 품목을 주고받았다. 꿀, 인삼 등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IMF를 기점으로 다시 가성비 위주의 선물세트로 변화했다. 대표적으로 참치캔 등 가공식품 세트가 속한다. 2000년대에는 ‘웰빙Well-being’이 트렌드를 주도하면서 홍삼 등 건강 관련 선물을 주고받는 경향이 도드라졌다. 이후 또 한 번의 금융 위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지난해 추석 선물 트렌드는 명절 연휴 알차게 즐기기와 실용·간소화였다. 특히 지난해 유난히 작황이 훌륭했던 탓에 과일 가격이 내려가면서 관련 선물세트가 인기를 끌었다. 프리미엄 선물세트로 꼽히는 고가의 한우세트도 많이 팔렸다. 이와 함께 1인 가구를 위한 선물세트가 등장해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가정 간편식과 반조림 식품도 인기를 누렸다. 나 홀로 고화질 영상을 즐기는 홈시어터 족의 소확행1)을 위한 가전제품도 인기였다.

 

2020년 추석 키워드, 건강·홈술·홈카페·장마
그러나 올해는 사뭇 다르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올 추석 선물세트의 주요 키워드는 건강, 홈술, 홈카페, 장마, 태풍 등으로 조사됐다. 장기간 이어진 장마도 트렌드 변화에 일조했다. 명절 효도 선물로 불리는 과일의 수급이 예년에 비해 부족한 영향도 크다. 길었던 장마로 인해 과일이 자랄 수 있는 일조량이 부족해지면서 과일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올해 수확된 ‘배’는 충분한 햇빛을 받지 못한 나머지 잘 자라지 못해 선물세트로는 적합하지 않아 수급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배와 함께 제사상에 오르는 사과 역시 마찬가지다. 최장의 장마로 인해 발육 상태가 좋지 않아 대체로 크기가 작은 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는 올해 햇배는 장마와 태풍으로 지난해보다 19%가량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사과 공급량도 지난해 대비 약 10%가량 하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특히 선물세트에 주로 쓰이는 큰 배의 생산량에 눈에 띄게 줄면서 추석이 다가올수록 배 시세는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미안한 마음, 고가의 선물로 대신 합니다
찾아가지는 못해도 부모, 친지 등을 위한 마음이 선물 구매에도 반영되고 있다. 지난해보다 고가의 제품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면서 한우 선물세트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다. 8월 13일부터 9월 3일까지 E 유통업체가 판매한 추석 선물세트 사전예약 판매량에 따르면 전체 실적은 11% 늘어난 가운데 한우세트는 25.6% 늘었다. 특히 20만 원 이상의 고가 한우세트의 매출과 비중이 모두 증가해 눈길을 끈다. 전년 대비 30% 가까이 많이 팔렸고, 매출 비중은 지난해보다 2% 올라 70%에 육박한다.

와인과 양주 등 고급 주류에 대한 선호도도 크게 올랐다. 누군가와 대면하지 않는 비대면 생활로 인해 집 안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혼자 홈술, 홈카페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진 영향이다. 특히 홈술족들이 늘면서 술집이나 바에서 마시는 것과 같은 맛과 분위기를 위한 제품을 찾는 경향이 도드라졌다. 실제로 와인세트는 지난 8월 중순 추석 선물 예약판매가 시작된 이후 18일 동안 약 4500세트가 판매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96.1% 늘어난 양이다. 업계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코로나 블루’2)를 이기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커피잔, 유리컵에 각기 취향에 맞춘 음료를 담아 마시며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위로하는 셈이다. SNS상에는 ‘#홈술’, ‘#홈카페’와 함께 생활을 공유하는 이들도 즐비하다.

‘건강을 선물 하세요’
유통업계는 기존의 추석 명절세트에서 벗어나 건강세트, 방역세트 등 변화한 분위기에 맞춰 품목을 다양화하겠다는 전략을 내놨다. 눈에 띄는 건 손 소독제와 손 세정제, 마스크 등이 포함된 위생세트다. 비접촉 체온계, 휴대용 살균기가 포함된 선물세트도 출시됐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선물이지만 요즘 같은 때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다. ‘방역을 선물하라’는 위생세트는 800세트가 넘게 판매되며 소비자의 관심을 한 몸에 끌고 있다.

면역력 증진 등을 위한 건강세트를 찾는 이들도 늘었다. 한 대형마트의 경우 이달 13일부터 28일까지 16일 동안 추석세트 사전예약 매출이 지난해 추석 시즌보다 57%가량 증가했다. 이 기간 건강세트는 지난해 대비 285% 더 많이 팔렸다. 홍삼 등 면역 기능을 앞세운 선물세트 매출은 303% 늘었고, 인삼·더덕세트 판매도 45% 많아졌다고 한다.

배송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선물세트는 통상 신선식품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대면 배송이 관례였다. 그러나 배달원과 고객 모두의 안전을 위해 대면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이 올해 추세다. 대신 고객이 요청한 날짜와 장소에 배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배송 기사의 마스크 착용과 위생장갑 착용도 의무화했다. 방역 서비스도 등장했다. 선물 배송 상자가 가정으로 배송되기 전 소독 처리를 거치고, 방역 처리가 완료된 차량을 통해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게 배송하겠다는 것이다.

코로나19는 폭염과 장마에도 살아남아 우리 삶을 크게 바꿨다. 예년 이맘때면 추석 연휴 여행 계획을 세워 저마다 고향으로, 해외로 떠날 마음에 들떠 있을 때다. 그러나 전 세계가 멈췄다. 소규모 모임을 지향하며 장시간·장기간 외출을 꺼린다. 답답하기만 했던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점차 적응해 나가며, ‘나’를 위한 우려를 넘어 ‘너’를 배려하기 위한 마음들이 모이고 있다.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며 건강세트와 방역세트를 전하고, 추석 차례상을 함께 하지 못하는 대신 고가의 한우로 그리운 마음을 전한다. 비록 사랑하는 가족들을 쉽게 찾아갈 수 없는 추석 명절이지만 몸은 멀어도 마음만은 가까이 있다. 지겨웠던 장마도 지나갔듯이, 코로나19도 하루빨리 지나가길 바라본다.

1)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2)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 코로나의 확산으로 일상의 큰 변화가 생기면서 느끼는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한다.


글 | 조현선_뉴시안 기자

더 알아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