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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농민의 휴가, 선비의 휴가

휴가는 다녀오셨는지?’ 최근 종종 듣는 말이다. 혹서기에 직장에서 풀려나 풍광 좋은 바닷가나 계곡 등 휴양지에서 작정하고 며칠을 쉬고 왔느냐는 얘기다. 불행하게도 이번 여름에는 아직까지 그런 행복한 일이 없었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휴가란 근대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국민소득이 꽤 높아진 최근의 일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직장을 떠나 일정한 기간 집과 아주 먼 곳에서 시간을 한가롭게 보내는 휴가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면 휴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조정은 365일 돌아간다. 왕이 ‘출근’하지 않는 날은 없다. 따라서 왕은 물론이고 신하들에게도 혹서기라 해서 특별히 정식으로 휴가를 떠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세종대왕 혹은 퇴계 이황 선생이 오늘과 같은 ‘여름휴가’를 보내는 모습은 상상 속에서도 없는 일인 것이다.

초복에서 말복 사이, 농민의 휴가

다만 고된 노동을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은 혹서기나 혹한기를 만나면 쉬게 해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노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한다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휴가는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조선시대 사회구성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의 삶은 고단한 노동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특히 모를 내고 김을 매는 6월 중순에서 7월 중순 경까지는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농번기다. 이 시기가 지나면 숨을 조금 돌린다. 하지만 그때는 곧 타는 듯한 삼복더위다. 바로 그때 잠시 짬을 내 일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농민의 삶에 대한 보고서인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그 잠깐의 휴식을 이렇게 전한다.

“삼복도 속절이요, 유두는 명절이라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하여
사당에 제사하고 한때음식 즐겨보세
부녀는 허피 마라 밀기울 한데 모아
누룩을 디디어라 유두 누룩 허느니라
호박나물 가지김치 풋고추 양념하고
옥수수 새 맛으로 일 없는 이 먹어 보소”

농가월령가 인출본印出本

삼복과 유두에 잠시 쉬는 것이다. 2019년 올해로 보면 초복과 중복은 7월 12일ㆍ22일이고 말복은 8월 11일이다. 유두는 7월 17일이다. 그러니까 7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다. 요즘의 여름 휴가철과 꼭 맞는다. 농사짓던 손을 잠시 멈추고 삼복과 유두날에 원두막의 참외도 따고 밀을 갈아 국수도 만들어 한때의 별미를 즐긴다. 술도 빠질 수 없다. 밀기울로 누룩을 밟아 만들고 유두날 마실 술을 담는다. 호박나물과 가지김치, 풋고추를 안주로 삼고 옥수수도 쪄서 먹는다. 멀리 휴양지 혹은 피서지로 떠나는 것은 조선시대 농민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삼복이나 유두에 이렇게나마 정자나무 아래서 혹은 개울가에서 농사일로 지친 몸을 쉬게 하고 더위를 쫓았던 것이다. 이게 농민의 여름휴가인 셈이다.

학습으로부터의 짧은 해방, 양반의 휴가

양반은 농민의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다.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몸을 혹사하는 노동은 없다. 하지만 박지원이 「양반전兩班傳」에서 탁월하게 그렸듯 양반 노릇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양반 행세를 하던 농민이 양반 노릇을 못하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을까. 양반 중에서도 특별히 괴로운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의 선비다. 시험에 붙고 나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과문科文을 죽도록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그 과문 공부란 것이 한여름이면 영락없는 중노동이다.

1787년 여름 26세의 정약용丁若鏞은 친구 이기경李基慶의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던 한강의 정자에서 권영석權永錫ㆍ정필동鄭弼東 등과 과문 공부에 골몰하고 있었다. 글을 짓노라 끙끙거리고 있는데 이기경이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사람이 살아야 몇 년을 산다고 이 여름에 답답하게 글이나 짓고 있는가. 집에서 좋은 소주도 보내왔으니 월파정月波亭 앞에 배를 띄우고 한잔하는 것이 어떤가?” 이구동성 좋다고 하였다.

용산에서 배를 띠워 동쪽으로는 동작 나루를, 서쪽으로는 파릉巴陵(현재의 양천구)을 바라보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저녁 무렵 월파정(정확한 장소는 미상)에 도착하였다. 곧 밤이 되자 달빛이 물결 위에 찬란하게 빛났다. 그 황홀한 경치를 보고 누군가 시를 짓자고 말했다. 선비의 버릇이 아닌가. 다산은 이렇게 답했다. “오늘 글 짓는 것이 싫어서 이곳을 찾아왔는데, 왜 눈살을 찌푸리고 수염을 비비 꼬면서 시를 짓느라 머리를 쥐어짜야 한단 말인가? 그럼 이 월파정 밤 풍경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나? 술이나 마시는 게 좋겠네.”

과거를 위해 허구한 날 과문을 짓는 것은 오갈 데 없는 ‘학습 노동’이다. 그 노동에서 해방되고자 이렇게 한강에 배를 띄우고 강물에 비치는 달빛을 감상하러 나왔다. 그럼 그에 어울리게 술이나 마시고 취할 일이다. 무슨 시 짓기란 말이냐! 다산의 말이 백번 옳지 않으냐? 모두 다산의 말을 따라 취할 때까지 마시고 돌아왔다. 이게 다산의 여름휴가이자 선비의 휴가였다.

어느 쪽이 좋은가? 내가 거둔 밀을 갈아 국수를 내리고 막걸리를 담아 가족과 동리 이웃과 먹고 마시며 담소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배를 타고 한강의 정자에서 친구들과 달빛을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좋은가. 참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아마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여름휴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사족蛇足 한 마디. 다산은 정말 그날 시를 짓지 않았을까? 『다산시문집』을 보면 월파정에서 지은 시 4수가 남아 있다. 다산도 선비의 본색은 감출 수 없는 사람이었나보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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