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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

글 우승하(민속기획과 학예연구관)

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 아이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정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조선 후기 이후 전해지는 천인천자문은 그 물음에 대한 한 방식의 응답이다. 한 아이의 탄생 앞에서, 가족은 혼자 기원하지 않았다. 천 사람을 찾아가 글자 하나씩을 받아 모았다. 그렇게 모인 천 글자는 한 아이만을 위한 한 권의 책이 되었고, 그 앞날을 비는 공동의 마음이 되었다.

천인천자문은 『천자문』의 글자를 한 자씩 나누어 받아 엮은 책이다. 이름 그대로 천 명의 사람이 한 글자씩 맡는다. 글을 청하는 이는 집안의 어른에서부터 덕망 있는 이들까지 두루 찾는다. 직접 발로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한 글자를 부탁한다. 이 과정에서 ‘걸자천자문乞字千字文’이라 불리기도 했다. 글을 얻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행위에는 겸손이 담기고, 글을 건네는 이의 손에는 축원이 실린다.

천지인자문

천인천자문
정옥(正沃)의 돌을 기념하며 만든 책
1934, 33.8×26.5cm, 민속30034

이때 글자는 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 사람의 삶과 이력이 함께 따라온다. 그래서 천인천자문은 천 개의 글자이면서, 동시에 천 명의 관계로 이루어진 기록이다. 생원이나 진사에게 받은 글자도 있고, 이웃의 평범한 필체도 섞인다. 명필과 서툰 글씨가 나란히 놓인다. 글자 아래에는 이름이 남는다. 한 권의 책 안에 서로 다른 삶의 흔적이 겹친다.

이 유물의 의미는 기록으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삶의 방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아이가 태어난 해, 같은 마음으로 천인천자문을 만들었다. 서툰 솜씨로 서문을 짓고, 그 종이를 들고 사람을 찾아 나섰다. 학계와 박물관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을 찾아가 글자를 청했다. 그러나 그 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해 동안 머물렀던 울산 달곡마을을 다시 찾았다. 조사자로 머물던 시간을 지나, 이번에는 아이의 이름을 품은 아버지로 마을을 찾았다. 마을 어른들에게 한 글자씩을 청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더디게 흘렀다.

한 글자를 받는 일은 가볍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글씨를 내놓는 일에 부담을 느꼈다. 종이를 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는 모습도 자주 마주했다. 어떤 이는 “내 글씨가 괜찮겠나?”라고 되묻기도 했다. 또 다른 이는 『천자문』을 넘겨보며 어떤 글자를 써야 할지 오래 고민했다. 좋아하는 글자를 고르는 일도, 그 글자를 천자문 순서에 맞춰 찾는 일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인천자문
양호(諒鎬)의 돌을 기념하며 만든 책
1933, 43×30cm, 임동권 기증, 민속62653

더 난감한 순간도 있었다. 뜻이 분명하지 않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글자는 피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는 글자의 맥락을 설명하거나, 다른 글자를 함께 제안하며 다시 부탁해야 했다. 한 글자를 받기까지 몇 번을 오가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천 사람을 찾는다는 일은, 수를 채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 사이에는 망설임과 설득,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겹친다. 천인천자문은 그렇게 완성된다. 한 권의 책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만남이 담긴다. 글자를 모으는 과정은 곧 관계를 되짚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갈 것인지 고민하고, 찾아가고, 말을 건네고, 시간을 들인다. 그 시간이 쌓여 한 아이를 위한 책이 된다.

서문에 적은 한 구절은 그때 필자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誠也、宇宙之本也… 敬也、至誠之道矣。”

여기서 ‘성’과 ‘경’은 필자가 지은 아이의 이름에 쓰인 글자다. 필자는 그 이름에 삶의 바람을 함께 담았다. 성은 우주의 근본이고, 경은 성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름을 짓는 일과 천인천자문을 만드는 일은 그렇게 하나의 마음으로 이어져 있었다. 천인천자문은 아이의 무병과 앞날을 기원하는 길복 문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한 아이를 위해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고, 그 마음이 글자로 남는 과정. 그것은 공동체가 한 생명을 맞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서문

우승하 학예연구관이 성경誠敬의 천인천자문을 위해 쓴 서문

가정의 달을 맞아 이 유물을 떠올리면, 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문 앞에 서서 글자를 청하던 순간이다. 문이 열리고, 짧은 인사가 오가고, 한 글자가 건네지던 시간. 그 반복 속에서 아이의 이름은 조금씩 채워졌다. 그리고 그 이름은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함께 깃든 이름이 된다. 천인천자문은 지나간 풍속이지만, 지금에도 하나의 물음을 남긴다. 우리는 한 아이의 삶에 어떤 마음을 더하고 있는가. 그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민속소식 제315호  (2026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