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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일지

조사하면서 늘 듣던 말, “애들은?”

원고 의뢰를 받고 한참을 망설였다. ‘아이들과 함께 한 지역 조사’라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직 공무원으로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현 정부의 정책기조에 따르는 일이라는 생각에 원고를 집필하게 되었다. 세종시 민속조사 과정에서 세 아이들과 미륵댕이마을에서 지낸 이야기를 조금은 편안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2015년 2월 13일부터 10월 11일까지 세종시 전동면 미곡리에서 9개월간 현지에서 상주 조사를 하였다. 2014년 말에 전 연구직을 대상으로 세종시 장기 조사에 대한 희망자 모집에 대한 결과였다. 이미 2009년에 상주 조사에 대한 제안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맞벌이에 다섯 살, 세 살 형제를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필자는 당시 다짐처럼 이렇게 말했다.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 민속 상주 조사인데, 아이가 더 크면 조사 기회를 꼭 만들어 보리라.” 그 다짐은 내게 소중한 것이었다. 2015년, 아이들은 5학년, 3학년이 되었고 그 사이 태어난 다섯 살 막내까지 삼형제의 엄마가 되었다. 이제 큰 아이를 믿고 조사를 할 수 있으리라는 다소 용감한 기대감까지 생겼다. 그리고 민속조사에서 장기 조사는 마을주민과의 라포형성이 중요한데 아이들과 함께 마을 주민으로서 살면 오히려 현지에 제대로 녹아드는 기회가 될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지금도 서울을 떠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둘째 아들이 울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대성통곡의 장이 되었다. 아빠와 처음 떨어져 살게 된 아이는 아빠 앞에서 아기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고 그 울음은 전염되었다. 아빠는 주말마다 오실 거라며 우는 아이들을 달래고 트럭에 짐을 싣는데 에만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전동면 미곡리의 미륵댕이마을에 이장님이 살던 60년 된 집이었다. 짐을 옮기고, 주소지를 이전하고, 아이들 전학절차를 진행했다. 아이들 전학 과정에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전동초등학교라는 아담하고 소나무 숲이 예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 5학년이었던 큰 아이의 전학으로 전동초등학교는 학년 전체가 8명으로 늘어나는 기쁨을 누렸다. 막내까지 같은 학교 병설유치원에 보내게 되면서 세종시에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조사지인 세종시 전동면 미곡리는 세종시 북부에 있는 운주산 아래 있다. 남쪽 평야지대에 있는 신도시, 행복도시와는 대비되는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그 중 필자가 거주했던 미륵댕이는 마을 한 끝, 기차 길 옆에 미륵님을 모시고 있는 마을이다. 미륵당이 있다고 미륵댕이라 불리는 이 마을에서는 정월 열 나흗날이면 할아버지 미륵과 할머니 미륵을 정성껏 모신다. 이를 ‘미륵고사’라고 한다. 6·25 한국전쟁에서 격전지로 개미고개 길목에 있던 이 마을은 여러 번의 폭격에도 사상자가 적었으며 전염병이 한참 돌 때도 환자가 없었다고 하는데 마을주민들은 한결같이 이를 미륵님 덕분이라고 말한다. 손이 귀한 집 부인이 미륵님에게 치성을 드리면 사내아이를 낳고, 명이 짧은 아이에게 미륵님을 부모 삼아주면 오래 살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실제 대상이 마을에 지금도 생존하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교회를 다녀도 성당을 다녀도 미륵님 모시는 데는 갖은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미륵댕이는 삶의 공간이자 놀이터였다. 미륵고사를 하던 날, 아이들은 집 앞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제물 준비하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마을회관 앞을 공연히 서성거렸다. 제물을 싣고 옮기는 리어카 뒤를 멀찍이서 수줍게 뒤따르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지금도 기억난다. 미륵고사를 지내던 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했던, 그러나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맑았던 쨍한 냉기를 내뿜는 막바지 겨울날이었다. 추우니 집에 있으라는 필자의 말은 한귀로 들은 개구쟁이 막내는 잠바를 입고 마을회관 앞을 뛰어다녔다. 당시 최연소 마을주민이었던 막내 아이에게 마을회관 앞길은 그저 놀이터였다. 조사를 위해, 인사를 위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집 앞 마을회관을 그저 제 집 문 열 듯 드나들게 되었는데 문을 열면 늘 상 듣는 말은 “애들은?”이었다. 그게 인사였다. 길을 걸을 때도 누구를 만나도 어르신들의 인사는 언제나 “애들은?”이었다. 이미 필자는 외부에서 찾아온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저 동네 애기엄마였다. 마을 일에 관심 많은 애기엄마. 마을 어르신들은 젊은 애기엄마가 이런 저런 옛날이야기를 물어보는 게 신기했는지, 대견했는지, 그동안 참아왔던 이야기보따리를 날이 저물도록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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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덕분에 필자는 마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연스레 동네사람이 되어있었다. 아이들의 안부는 늘 인사말이자 궁금한 이야기가 되었다. “학교 갔어요.”라고 대답하면 언제 오냐고, 회관에서 언제 뭘 해놓을 거니 애들 데리고 오라고, 애들 데리고 와서 같이 먹자고‥‥. 마을의 어르신들은 필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게 그들의 소소한 말거리 되었다. 라포 형성을 위해 먼저 다가가는 일이 습관이 되어있던 필자는 당황스럽지만 반가운 이 경험을 즐기고 있었다. “아들 셋 키우느라 얼마나 힘든 겨. 커피 마시고 가.” 투박하지만 정이 담긴 한 마디는 조사와 육아로 지친 필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런 말씀을 해주시던 최삼례(2015년 작고, 당시 93세)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손수 커피를 타주셨다. 달달한 믹스커피에 보약 같은 말씀을 남기고 조사를 마치기 직전, 세상을 떠나셨다.

2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훌쩍 커서, 중1, 5학년, 일곱 살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은 세종시에 가자는 말을 한다. 마을에서 살던 집을 돌아보고 마을회관에 들러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고 미륵당에도 가보고 운주산에 오른다. 조사를 위해 생활한 마을에서의 9개월은 우리 아이들에게 삶이자 추억이 되었다. 마을을 떠나던 날, 이장님 부부를 비롯한 마을 어르신들은 뭐라 말씀도 못하시고 짐을 실은 트럭과 우리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지켜보셨다. 그 마음을 감히 서운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조사를 통해 2016년 보고서를 발간했고 마을 박물관 전시도 했지만 가장 큰 수확은 마음 안에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나는 미륵댕이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필자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애들은?”

글_안정윤 │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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