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위치를 정확히 지적할 수 없는 지역들이 있다. 뚜렷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랜드마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여러 행정구역 가운데에 위치하다 보니 경계가 모호해져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의정부와 포천, 동두천, 파주, 도봉구 등에 둘러싸인 양주시가 바로 그런 곳.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곳의 미술관과 박물관들, 특히 조명박물관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는 장면들이 적지 않으니까. 그래서 곧 다시 방문할 예정일 테니까.
양주,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의 흔적들
양주가 한반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 시기. 치열한 전투 끝에 백제로부터 한성을 빼앗은 고구려는 지금의 양주에 매성군창화군으로 부르기도 한다을 두었는데, 상당한 요충지였다고 한다. 이후 굵직한 역사의 변곡점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조선왕실에서 여러 차례 찾았던 회암사의 옛터에 세워진 회암사지 박물관에서 이런 사실을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는데, 근래 개장한 곳답게 시설과 전시상태가 상당히 세련된 공간이니 꼭 한 번 들러볼 만하다. 만약 양주시의 역사보다는 현재의 모습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바깥에서의 활동이 부담스럽다면 박물관과 미술관들의 목록을 점검하는 게 좋겠다. 오래전부터 양주는 송추와 장흥으로 대표되는 서울 근교 나들이 명소를 품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곳보다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가장 폭넓게 선택할 수 있는 곳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아래에 소개할 공간들을 통해 말이다.
의외의 공간에서 만나는 빛의 얼굴들
양주시 내에서 다양한 유물과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8개. 25만 인구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독특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조명박물관일 것이다. 빛과 조명을 주제로 한, 1종 전문박물관2005년 등록이자 국립민속박물관 협력망 사업 참가 박물관 중 한 곳이다. 광적면에 위치한 조명박물관에서는 5개의 상설전시관과 2개의 기획전시관을 운영 중이다. 빛을 밝히는 조명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한눈에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 조명전문기업 KH필룩스가 2004년 설립했다. 조명박물관 1층 상설전시관에서는 전통조명, 근현대조명, 엔티크조명을 섹션별로 관람할 수 있고, 과도한 빛은 빛공해를 낳고 있음을 알리는 빛공해 전시관을 통해 빛의 양면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층 전시가 조명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제점까지 생각해보는 공간이라면 지하 1층 빛상상공간, 라이팅빌리지는 빛의 신비함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상설전시관이다. 빛상상공간에서는 마치 미로처럼 구성된 길을 지나며 다양한 형태의 빛과 그 빛을 통해 연출되는 생경한 장면들에 감탄이 멈출 새가 없다. 불똥이, 호롤이, 빛돌이 등의 조명캐릭터가 있는 어린이 체험공간인 라이팅 빌리지에서는 어린이들이 놀이하듯 쉽고 재미있게 조명을 접할 수 있다. 이 공간에서는 어린이들이 즐겁게 놀며 다양한 조명과 친근해지는 광경을 만날 수 있다. 빛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의 한 장면인 셈이다. 좀 더 진지한 관람을 원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공간도, 물론 존재한다. 특히 빛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획 전시를 이어오고 있는 것도 조명박물관의 특징 중 하나. 덕분에, 우리의 삶과 예술에 있어서 색과 빛 그리고 어둠이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 외 조명박물관은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지역문화플랫폼육성사업 등의 의미 있는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2018년에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기획전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색다른 점은 조명박물관 내, 전문 공연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명박물관 공연장은 양주시 유일한 등록 소극장으로, 평일에는 단체 관람객 대상의 공연이, 주말에는 개인 관람객 대상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빛과 조명을 주제로 한 어린이, 가족극이 주로 공연되며, 뮤지컬, 놀이극, 그림자극, 마당극, 음악극 등의 다양한 형태의 수준 높은 창작 공연으로 관람객들의 큰 호응과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다. 새롭게 기획한 공연이 시작되면, 인근 지역은 물론 서울 전역에서 ‘단골 관객’이 몰린다는 게 박물관 관계자의 전언. 가족 모두의 눈높이에 맞춘 다양한 전시와 체험이 기다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 수밖에. 그러니, 조명박물관은 아이들과의 주말 나들이를 고민하고 있다면 가장 먼저 리스트에 올리는 게 좋겠다. 물론 조명박물관과 연계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혹은 친밀하게 다가서는 예술적 경험
조명박물관과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는 장흥 유원지가 여전히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음식과 유흥이 아닌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향유하기 위한 공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다양한 미술관들이 장흥 유원지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인데, 그중 가장 굵고 깊은 뿌리는 2014년 개관한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의 것이다.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은, 박수근과 이중섭 그리고 김환기 등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2세대 서양화가 장욱진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 서양화풍을 배우는 데에 집중했던 1세대들과 달리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하던 장욱진은 1947년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사실을 새롭게 보자”는 기치 아래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사물의 표면이 아닌 그 안에 내재 된 본질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렇다 해서 그의 작품들이 거칠거나 뜨겁지는 않다. 오히려 다정하고 따뜻하다. 특히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라 감상의 즐거움이 커진다. 이러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는 공간 역시 화가 장욱진의 작품들만큼이나 상냥하다. 특히 아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먼저 다가설 수 있는 알록달록한 조각상들과 오브제들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정원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점이 반갑다. 그리고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의 한가운데에는 2014년 김수근건축상을 수상한 미술관이 하얗게 빛나고 있어 따뜻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내부 역시 작가의 작품들과 더없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될 수 있는 한 느리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양주시립 민복진미술관에 닿을 수 있다. 지난 2022년 3월 개관한 신생 미술관이지만 그 안에 전시된 작가의 작품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다. 특히 광화문 사거리 동화면세점 앞에서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준 <가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미술관 안에 들어서면, 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각가 민복진과의 만남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고 친밀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그가 천착하는 주제가 모정과 가족 등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것이기에 가족 단위 관람객들에게는 서로가 서로의 소중함에 대해 환기하는 기회가 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양주에서의 하루는 예상보다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 평소 예술적 소양이 높지 않다거나 흥미가 없다 생각하는 사람도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작품들과 교감할 여지가 크기 때문. 그러니 만약 서울 어디에선가 출발했다면, 될 수 있으면 넉넉히 일정을 잡도록 하자. 예상보다 지체된다 해서 조급해하지 말도록 하자. 다른 어느 곳보다 서울과 가까운 곳에 고요하게 위치한 곳이니까.
미니인터뷰
빛과 어둠, 그 공존과 조화의 공간으로 초대합니다
– 안상경(조명박물관 학예연구사)
조명박물관은 조명이 소재이자 주제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느 곳보다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지요. 인공조명의 편리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문제점을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조명문화를 지향해야 할까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주말관람객을 위해서는 빛이 나는 조명만들기 체험이나 소극장 공연 관람 추천 드립니다. 주말 상설체험은 현장에서 참여 가능하시지만, 상설공연의 경우, 사전 예매를 필수로 하며 주말 오후 1시, 3시 두 차례 진행됩니다. 가족 관람객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고 일부러 찾은 보람이 있다는 평이 많으니 조명박물관을 방문하신다면 관람하시길 추천드려봅니다. 그러나 조명박물관 공연장은 4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상설공연이 진행되므로 이를 확인하시면서 방문해주세요. 조명박물관은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생활사박물관 협력망 기관으로 국립민속박물관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더 성장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공동기획전을 함께하며 전시의 표준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고요. 찾아가는 어린이박물관을 통해 교육프로그램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교보재사업을 통해 전통주마등 복원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으로 저희와 같은 사립박물관에게 국립민속박물관은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박물관들에게 지금처럼 좋은 역할을 해주시기 바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협력망 사업을 특히 응원합니다.
글 | 정환정_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