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 이야기

동지의 팥죽 뿌리기와 팥죽의 의미

글 김용갑(전남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선임연구원)

팥죽(한식진흥원)

팥죽(한식진흥원)

“첫눈이 내리는 날 항아리 속의 팥죽은 살얼음만 살짝 끼었을 뿐 꽁꽁 얼어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다지 춥지 않은 남부 지방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팥죽을 사발에 담아 수저로 떠먹으면 그 맛은 텁텁하면서도 담백하고 구수했으며, 새알의 식감食感은 적당히 딱딱하면서도 물컹하고 쫀득거렸다. 이 맛과 식감은 아마도 당시의 동지팥죽을 먹어본 사람만이 알고 기억하는 한민족만의 미감味感일 것이다. 그렇기에 동지팥죽의 맛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전통의 맛이요,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민족의 맛이며, 이런 맛이 있기에 동지팥죽이 현대에까지 계승되고 어느 명절의 절식보다도 많이 마련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시 쓰는 한국 풍속』 중에서-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 동지 ··· 작은설·아세·아찬설로 불리기도
동지冬至는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로 양력으로 12월 22일경에 드는 세시 절기이다. 한민족韓民族이 동지를 명절로 삼은 것은 기록상 고려시대부터이며,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1970년대 무렵까지도 민간에서는 동지를 맞아 팥죽을 쑤어 조상과 성주신 등의 가신에게 올리는 한편, 집 안팎에 뿌렸다.
그렇다면 왜 한민족은 동지를 명절로 삼았을까? 이는 중국을 비롯해 고대 한민족이 음력 1월(정월)과 함께 동짓날이 속한 음력 11월(자월)을 새해 첫 달로 삼았으며, 동짓날에 음陰의 기운이 정점에 이르기에 이날부터 양陽의 기운이 시작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고대의 어느 시기에는 동지가 ‘설날(새해로 여김)’이었다. 이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이 더 든다는 인식과 함께 팥죽의 새알심을 나이 수대로 먹는 풍속, 그리고 동지를 ‘작은설’, ‘아세亞歲’, ‘아찬설’ 등으로 부른 것에서 확인된다.

애동지에는 팥죽 쑤지 않거나 떡 빚어 ···팥죽은 태양(나이 한 살)을 먹는 것
동지는 양력으로 기념하는 세시 절기였지만, 민간에서는 음력의 관념에 따라 쇠던 명절이었다. 동짓날을 음력으로 환산했을 때 11월 초순께에 해당되면 이를 ‘애동지’ 또는 ‘아동지’ 등이라고 하였다. 이때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동지를 쇠지 않거나, 팥죽 대신 팥떡을 마련하여 동지를 지냈다. 이처럼 ‘애동지’를 쇠지 않거나 팥죽을 쑤지 않는 풍속에는 일종의 언어적 주술 관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지의 명칭에 ‘아이(애)’가 포함돼 있어 이날 팥죽을 쑤면 아이들에게 해롭고 심지어 아이가 죽는다고 여겼다. 팥죽이 주로 상갓집의 부조 음식으로 쓰였기에 팥죽을 죽음과 연관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우리 조상들이 자녀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으며, 부정不淨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동지는 한 해 중 밤이 가장 긴 음의 날로, 음은 어둠이고 부정함이며 이 부정의 최대치는 죽음이었기에 이를 물리치기 위해 이날 태양을 형상화한 새알(심)을 만들고 태양빛의 붉은 팥으로 동지팥죽을 끓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음식을 성주나 조상신 등의 가신家神에게 올리고 이를 집 안팎에 뿌려 잡귀나 액운을 쫓았다.

팥죽 뿌리기는 제액축귀 의례이자 고수레처럼 신을 대접하는 방식
팥죽 뿌리기로 불리는 이 의례는 한국 풍속에서 제액축귀의 의례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수레처럼 신에게 팥죽을 대접하는 방식이자 동지를 쇠는 의례였던 것도 분명하다. 왜 그럴까? 이는 우리 풍속에 대한 천착을 통해 찾을 수 있다. 팥죽 뿌리기가 단지 잡귀와 같은 부정不淨함을 물리치는 주술적 의례라면, 왜 이 부정함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초상집에서는 팥죽은 있되 이를 뿌리지 않았으며, 축귀 의례의 전형인 객귀물리기(푸레박질) 등에서는 왜 팥죽 뿌리기를 찾기 어려운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 시기의 집 안팎은 가정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터주·조상신 등과 같은 여러 가신들이 정좌했던 공간이다. 따라서 이런 가신들이 머무는 장소에 잡귀를 몰아낸다는 이유로 팥죽을 뿌리는 것은 신앙의 관점에서 모순된 행위가 될 수 있다.

팥죽 뿌리기

팥죽 뿌리기

동지팥죽의 전거典據인 『형초세시기』에도 팥죽 뿌리기 풍속 출현 안해
특히 팥죽 풍속의 문헌적 근거로 제시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에는 ‘팥죽 뿌리기=벽사’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의 『동국세시기』 등에서 팥죽 풍속의 기원을 이 문헌에서 찾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이 기록을 팥죽 뿌리기의 전거典據인 것처럼 받아들여 왔다. 아울러 팥죽 뿌리기가 신을 대접하는 행위라는 점은 이 풍속을 행하는 이들이 그 목적을 ‘신을 대접하기 위해 팥죽을 뿌린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군산시 중동에서는 토지신을 달래고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동짓날 팥죽을 바가지에 담아 집 안 곳곳에 뿌렸다. 팥죽 뿌리기가 신 대접 방식이듯, 물이나 소금 뿌리기 또한 유사한 대접 방식으로 볼 여지가 있다. 현대의 인식과 달리 고대 시기에 소금과 물은 귀한 재화이자 생명 유지의 필수적인 물질이었기에 이를 뿌린다는 것은 불운을 가져올 수 있는 잡신 등에게 미리 귀한 것을 대접해 재액災厄을 막고자 했던 의례적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과 다른 동지 풍속 ··· 중국은 동짓날 만두류인 혼돈餛飩을 먹어
그렇다면 고대 시기 팥죽을 공통으로 식음했던 한국과 중국의 동지 풍속은 이후 어떻게 달라졌을까? 1758년 간행된 중국의 『제경세시기승』에는 동지하례*와 함께 혼돈餛飩** 류의 음식 등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나타난다. 이어 1906년에 편찬된 『연경세시기』에는 민간에서 동지를 절기로 여기지 않으며 혼돈을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경의 풍속을 담고 있는 이들 세시기는 만두와 유사한 음식인 혼돈을 동지의 대표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1800년 전후에 편찬된 『경도잡지』에 동지의 풍속으로 달력 선물과 팥죽 뿌리기가 출현한다. 이후 1900년 이전의 풍속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는 『해동죽지』에는 팥죽 뿌리기를 비롯해 달력과 전약煎藥***을 선물하는 풍속, 부적을 대문에 붙이는 문비 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의 동지 풍속은 다르다. 그럼에도 ‘동지혼돈冬至餛飩’과 ‘동지팥죽’이라는 관용 어구에서 나타나듯, 두 나라 모두 음식이 동지를 대표하고 있다.
세시 절기(명절)를 쇠거나 기념한다는 것은 해당 절기에 행하는 의례, 즉 제사나 조상숭배를 실천하고 그 절기를 대표하는 음식을 마련하는 행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의례는 쇠퇴하거나 소멸한 반면, 그 명절의 음식인 절식節食-송편이나 떡국과 같이 그 명절을 대표하여 만들어지는 음식-은 길게는 1,500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전승될 수 있었을까?

치성을 드리는 모습

동짓날 가신에게 팥죽을 올리고 치성을 드리는 모습(출처: 『세시풍속』 충남 편(국립문화유산연구원))

찹쌀 새알의 식감 ··· 한민족 유전자에 각인된 민족의 맛
동지팥죽,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새알이 들어간 팥죽이 언제부터 동지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도 많은 한국인들은 동지가 되면 별도의 의례 없이 팥죽을 먹는다. 또한 대보름에는 문헌상 5세기 말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나반糯飯, 즉 찰밥이나 오곡밥을 먹는 풍속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명절(세시)이 절식 위주로 계승되는 것은 차례와 같은 의례의 경우 가변적인 특정 시대의 종교 및 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반면, 음식의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민족적 생활문화와 미감이 축적된 형태로 전승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동지를 맞아 식음하는 팥죽이나 추석의 송편 등은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이들 절식을 먹음으로써 한국의 오랜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한민족의 구성원임을 확인하며 스스로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지하례: 동지 아침에 조정 대신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올리는 축하 인사

**혼돈(훈툰): 얇은 밀가루 피에 고기 소를 넣고 싸서 찌거나 끓여 먹는 음식

***전약: 동짓날 임금님이 신하 등에게 내린 하사품(약용 음식)으로 소의 가죽을 고아 꿀, 계피, 생강, 대추 등을 넣어 굳혀 만듦

민속소식 제318호  (2026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