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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 세화

신년 그림 풍속, 세화(歲畵)

설날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歲粧,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하는 것을 세배歲拜, 시절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세찬歲饌, 이때 마시는 술을 세주歲酒라 한다. 그리고 연말연초 묵은해를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에 평안하고 풍요롭기를 비는 마음으로 문에 붙이고, 또 서로 선물하던 그림 풍속이 세화歲畫이다. 요즘은 새해가 되어도 문에 그림을 붙이거나 그림을 서로 선물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어 잊힌 풍속 가운데 하나이지만 김만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 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조선시대 세시기류의 기록을 보면 세화는 정월正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풍속이었다.

세화는 매년 도화서 화원들이 그려 진상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화의 지나친 제작에 대한 지적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이는 상당량의 세화가 매년 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종실록》 1537년 9월 29일 기록에는 정언 민수천閔壽千이 세화의 지나친 제작을 지적하면서 “조종조에서는 세화 제작량이 60장을 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20장씩 받아 가지고 석 달을 그리니 그림의 장수를 감할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의 도화서의 인적 구성으로 따져보면 400여장에 이르는 양이다. 조선후기 《육전조례六典條例》 진상조進上條에도 세화의 제작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세화는 자비대령 화원이 각 30장, 본서 화원이 각 20장을 12월 20일에 올려야 했으며, 문배門排와 양재禳災는 장무관과 실관 30명을 윤회로 임명하여 각 전·궁의 진상 및 각 문에 붙일 문배는 모든 화원에게 분배하여 12월 그믐에 올리도록 하였다. 조례에 규정된 세화가 모두 그려졌을 경우 1년에 600여장이 넘는 세화가 그려진 셈이다.

 

화원들에게 세화를 그리는 일은 다른 공적인 임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기본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일성록》정조5년, 1781에는 세화에 얽힌 화원들의 일화가 나온다. “올해에는 이른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솜씨가 익숙한 자도 모두 대충대충 그리는 시늉만 냈으니 그림의 품격과 채색彩色이 매우 해괴하였다. 세화를 잘 그린 자에 대해서는 원래 정해진 상격이 있으니, 못 그린 자에 대해서도 어찌 별도의 죄벌罪罰이 없겠는가. 이것 또한 기강과 관계된 것이다. 먼저 그려서 바친 화사 중에서 신한평申漢枰, 김응환金應煥, 김득신金得臣에 대해서는 곧 처분할 것이니 이로써 해조에 분부하되, 나중에도 다시 태만히 하고 소홀히 할 경우에는 적발되는 대로 엄히 처리할 것이니 미리 잘 알게 하라.”하였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신한평, 김응환, 김득신 같은 솜씨 좋은 화가들이 세화를 대충 그려 제출했다가 처분을 받을 처지에 놓인 것이다. 매년 수십 장씩 그려내야 하는 세화는 아마도 화원들에게 세공으로 바쳐야 하는 숙제 같은 그림이었던 듯하다.

이처럼 매년 그려진 수백 장에 달하는 문배와 세화는 어디에 쓰였을까. 문배는 제석날 나례 후 궁궐 내 여러 문과 실내에 붙이고 송축용 세화는 상하上下등급을 매겨 잘된 것은 왕에게 진상하고 나머지는 재상宰相과 근신近臣들에게 하사하였다.

‘문배門排’는 제석除夕에 나례儺禮를 행하고서 새벽에 문간에 내다 붙이는 것으로 중국의 문신門神신앙이 전해져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문배로는 닭, 호랑이와 같은 주술성이 강한 소재들이나 신도神茶·울루鬱壘, 금갑장군金甲將軍· 위지공尉遲公과 진숙보秦淑寶와 같은 수호신장들이 그려졌으며, 양문에 붙이는 것을 감안해 대개 한 쌍으로 그려졌다.

문배는 매년 새로 그려 붙이는 그림이면서 대문에 붙여 비, 바람에 손상되기 쉬워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궁궐 문 양쪽에 붙인다고 되어 있으니 아마도 경복궁의 문에도 붙어있었을 것이다. 문배 풍습은 민간에도 전해져 대문을 갖출만한 집에는 신장상이나 글씨를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다행스럽게도 안동 하회마을 북촌댁에 전해 내려오는 한 쌍의 문신상이 남아있고, ‘신도神茶·울루鬱壘’, ‘용龍·호’와 같은 글씨를 써 붙이는 풍속도 몇몇 종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해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송축용 그림으로는 「십장생도」, 「수노인도壽老人圖」와 같이 길상적 내용의 주제들이 주로 그려졌다.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은 몸이 아파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십장생도를 꺼내 보며 장수를 기원하고 성은에 감사하는 내용을 남겼는데『목은시고』 권12, 세화 기록 중에는 가장 이른 예이다.

십장생과 더불어 세화로 많이 그려진 것은 「수노인도」이다. 수노인의 모습은 작은 키에 전체 몸길이의 반을 차지할 만큼 크게 그려진 머리, 늘어진 눈썹 등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수노인은 남극 가까이에 있는 남극성南極星이 신격화된 것으로, 예로부터 이 별이 인간수명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수노인도를 「남극노성도南極老星圖」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인사는 아마도 ‘오래 사세요’ 였던 것 같다.

문배를 붙이는 풍속은 1960년대를 전후한 시기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리는 집안에서는 지켜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옥이 양옥으로 바뀌고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눈에 보이는 변화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변해 문에 무엇인가를 붙여 나쁜 기운을 막는 문신 풍속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신년을 그림 선물로 송축하는 풍속은 연하장이 대신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연하장에 떠오르는 해, 송학과 같이 장수를 상징하는 그림들로 장식하는 것은 세화 풍습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매년 많은 양이 반사를 목적으로 그려졌으나 아쉽게도 현존하는 그림들 가운데 세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밝혀진 그림은 없다. 문신과 세화 풍속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는 아직까지 볼 수 있는 풍속이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새해가 되면 문에 신도·울루상을 붙이고 한 해 액막이를 한다. 또 ‘민간년화民間年畵’라고 하는 민간의 판화 형태로 제작되어 값싸고 쉽게 제작, 소비되고 있다.


글 | 김윤정_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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