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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폿집에서 브루펍까지

산업화 시대 이후 한국 술 문화에 큰 변곡점을 그린 첫 번째 요인은 1960년대 양곡관리법 제정이라고 볼 수 있다. 1965년 발표된 이 법은 막걸리 및 약주, 그리고 소주에 우리 쌀과 보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막걸리는 수입 밀가루 막걸리로, 소주는 수입 알코올에 물을 넣어 만든 희석식 소주로 대체되었다. 즉 1965년 이전까지 즐겨 마시던 쌀 막걸리나 쌀 소주를 이때부터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막걸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안주로 파전이 꼽히지만 이때는 빈대떡이 대표적인 안주였다. 산업화 시대 초기의 음주 문화는 ‘대폿집’에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1977년에는 일시적으로 쌀 막걸리 제조가 허가되었다. 이때 을지로에 쌀 막걸리를 맛보겠다는 이들이 장사진을 쳤다는 신문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고도성장과 함께 맥주, 위스키 등의 대중화 시작

1960년대에 맥주는 고급 술로 꼽혔다. 당시 확산되기 시작한 추석선물세트에서 최고급으로 치던 선물이 바로 맥주 세트였다. 덕분에 당시 맥주 광고는 테니스, 조정, 승마, 전원생활 등 언제나 화려한 생활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생맥주는 1970년대 청춘의 상징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바지, 포크송과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때 생맥주는 용기를 100% 재활용한 덕분에 병맥주에 비해 비교적 저렴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명동의 ‘오비스캐빈OB’s Cabin’ 같은 업소에서 생음악과 생맥주를 즐기는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1970년대에는 독일 탐방을 다녀온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식 와인을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영천 및 경산 주변에 대규모 포도밭이 조성된다. 이때 태어난 와인이 ‘마주 앉아 한잔한다’는 의미의 ‘마주앙’이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소주를 위스키로 만들어준다는 분말가루도 있었다. ‘타’라는 이름의 갈색 인공착색료였는데, 소주에 타서 색깔만 그럴듯하게 바꿔주는 것이었다. 70년대 말에는 ‘캡틴큐’와 ‘나폴레옹’이라는 유사 양주가 등장한다. 100% 스카치위스키는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야 등장해 호텔 바 등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80년대는 동양맥주에서 독일과 같은 맥주 광장을 모델 삼아 ‘OB호프’를 만들었고, 칵테일이 여대생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진토닉, 싱가포르 슬링, 피나콜라다 등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주로 즐기는 곳은 경양식 레스토랑이었고 대표적인 안주는 돈까스였다. 80년대 초반부터는 소주와 맥주를 섞는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양맥’이라고 해서 양주와 맥주를 섞는 본격적인 폭탄주도 등장했다.

X세대 등장과 함께 해외 주류 문화도 본격적으로 수입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 최초로 배고픔을 모르고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자란 ‘X세대’가 등장했다. X세대가 주축이 되었던 90년대 초 ‘홍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주점은 일본식 선술집 로바다야키炉端焼き였다. 로바다炉端는 일본식 화로, 야키焼き는 구웠다는 뜻으로 일본식 화로가 있는 선술집을 뜻했지만 실제 화로가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그저 일본 가정 요리인 삼치구이, 시샤모, 팽이버섯구이에 어묵탕 정도만 갖춰도 충분히 멋져 보였다. 일본의 사케가 처음 들어온 것도 이때부터였지만 대부분 한국 술을 마셨다. 마치 횟집의 곁들이 찬처럼 하나를 주문하면 여러 음식을 갖다 주었다.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고급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OB맥주에 밀려 만년 2위에 머물던 크라운맥주는 ‘150미터 지하 암반수로 빚었다’는 하이트 맥주를 출시해 1996년 맥주 시장 1위를 달성, 이후 16년간 한국 맥주 1위라는 타이틀을 가져갔다. 이때 생긴 것이 신세대 이미지를 어필한 하이트 광장이다. 이전까지 주로 500cc와 1000cc로 나눠졌던 생맥주 잔에도 변화가 생겼다. 바로 ‘피처’ 잔이다. 2000cc의 큰 잔에 각자 따라 마시는 것이었다. 이때 호프집에서 가장 인기 많았던 안주는 바로 소시지 야채볶음. 어릴 적 추억이 있는 햄과 소시지에 양파 등을 넣고 볶은 요리다. 그때는 노가리나 소시지 요리가 맥주 안주로 인기였다. 치킨과 맥주가 잘 어울린다는 공식은 90년대만 하더라도 본격적이지는 않았다. ‘아무거나’도 인기 안주였다. 돈까스, 포테이토, 햄, 과일을 모두 넣은 모둠 안주였다. 회식 때 서로 의견을 맞추기 어렵거나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안주였다.

90년대부터는 수입 맥주의 공세도 시작됐다. 대표적인 것이 버드와이저, 밀러, 카프리 등이었다. 모두 작은 유리병 속에 담겨 있었는데, 굳이 병따개가 필요 없이 손으로 딸 수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이런 수입 맥주를 시키면 늘 병목에 냅킨이 돌돌 말려 있었다. 병을 따다손을 다칠까 봐 술집 주인이 베푼 배려였다. 이런 수입 맥주 문화가 발전되어 200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세계 맥주 전문점’이 등장했다.
술집 문화가 다양해지면서 편의점에서 술집과 같은 공간을 운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름도 편의점과 비슷한 편의방. 술과 안주를 사서 전자레인지에서 데워먹곤 했다. 하지만 자릿세를 받는 경우도 있었고, 집에서 먹는 듯한 편안함도 없어 곧 사라졌다.

주류 음용 문화 변천의 지향점은 ‘다양성 추구’

2010년에 들어서면서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지역 막걸리가 등장했고, 맥주 시장에는 크래프트 맥주가 브루펍brewpub_직접 맥주를 만들어 판매하는 술집 등을 중심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또 위스키처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양주 시장은 쇠퇴한 반면 증류식 소주라고 불리는 고급 소주, 연태고량주 같은 고급 백주白酒가 대두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고급 한식과 전통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한식 주점이 많아졌으며 중식집에서는 옛날의 값싼 고량주가 아닌 프리미엄 백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산업화 시대 이후 한국의 주류 음용 문화는 이렇게 계속 변화하면서 차별성과 다양성을 찾아가고 있다. 산업화 시대 초기의 획일적인 음주 문화는 고도경제성장 시대와 1988년 서울올림픽, 세계화 시대 등을 거치면서 오늘과 같은 다양성을 획득한 것이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명욱 | 주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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