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전경이 인쇄된 우편엽서
[/vc_column_text][/vc_column][vc_column width=”1/2″][vc_column_text 0=””]월미도와 항구 풍경이 인쇄된 우편엽서
[/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40935898{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0=””][vc_column_text 0=””]1899년 일본에 의해 경인선이 개통되며, 인천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도시 성장을 겪는다. 철도가 부설된 1900년을 기점으로 인구수부터 큰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1900년에서 1905년 사이 일본인의 증가는 300% 이상이었다. 1908년 4월 13일 통감부철도관리국에서 발행한 한국철도선로안내를 통해 당시 인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데, 각종 관공서를 비롯해 상업회의소, 각종 회사, 금융기관, 병원, 공원과 함께 일본의 신사와 사찰 또한 각각 3개씩 세워졌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인천이 일본인들이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 도시가 되었음을 시사한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0=””][vc_column 0=””][vc_column_text 0=””]인천 앞바다를 등대가 밝히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40935898{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0=””][vc_column_text 0=””]인천에서 한성까지 철도가 연결되며 그간 지지부진했던 등대 부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1883년의 조일통상장정 제31관을 통해 ‘각 항구를 수리하고 등대나 초표를 설치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로부터 특별한 움직임이 없자,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등대 건축 전문가인 이시바시 아야히코에게 한국의 전 연안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를 근간으로 당시 총세무사였던 존 맥리브 브라운과 32개소 등대를 부설하기로 협의했다. 이후 1902년 3월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인천해관 등대국이 탄생했다. 우리나라 등대 부설이 본격화해나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91077448{margin-bottom: 5px !important;}”][vc_column 0=””][vc_single_image image=”27406″ img_size=”full” alignment=”center”][/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35468611{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0=””][vc_column_text 0=””]1902년 건설된 팔미도 등대 ⓒ김종헌
[/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40935898{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0=””][vc_column_text 0=””]1902년 5월 16일부터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서 및 백암의 4개 등대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1903년 6월 1일 4개 등대는 점등을 시작했고, 이후 오랫동안 인천 앞바다의 뱃길을 밝히게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등대와 육로의 관계에 있다. 당시 새롭게 부설된 등대들은 모두 경인선이 있는 인천, 경부선이 있는 부산, 호남선이 있는 목포와 군산, 경원선이 있는 원산에 집중되었다. 결국 등대는 뱃길을 철도로 연결하는 점화기였던 것이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0=””][vc_column 0=””][vc_column_text 0=””]철길, 뱃길, 하늘길이 모인 관문 도시[/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40935898{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0=””][vc_column_text 0=””]1883년 인천 개항을 통한 일본 조계가 한국 침략을 위한 서곡이었다면, 경인선 부설은 서울로의 이동에 대한 편리성과 인천 거주의 안정성을 제공하는 계기였다. 일본과 원활하게 연결하기 위해 철로와 등대가 부설되었고, 이는 한국의 도시구조가 내륙 도시 중심에서 항구 도시 중심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자족적 도시구조에서 외국과의 연결이 모색되는 외부 지향적 도시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구조는 오늘날 국제도시 인천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60391522536{margin-bottom: 5px !important;}”][vc_column 0=”” width=”1/2″][vc_single_image image=”27403″ img_size=”large”][/vc_column][vc_column width=”1/2″][vc_single_image image=”27404″ img_size=”large” alignment=”righ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35468611{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width=”1/2″][vc_column_text]1974년 수도권전철 개통 기념 승차권
[/vc_column_text][/vc_column][vc_column width=”1/2″][vc_column_text 0=””]인천항 선거 건설 준공 기념우표
[/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35468611{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0=””][vc_column_text 0=””]100여 년 전 인천이 일본의 의도에 의해 서울의 진입구 역할을 해왔던 피동적 도시였다면, 이제는 철길, 뱃길, 자동차길, 하늘길이 모여 있는 진취적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현재의 인천에는 대한민국의 인적, 물적, 자원이 모여 세계로 진출하는 적극적인 기세가 존재한다. 과거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듯, 지금 한국의 모든 길은 인천을 통하고 있다. 인천의 이러한 가능성이 도시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지리적 역사에서 비롯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35468611{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0=””][vc_column_text 0=””]*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vc_row css=”.vc_custom_1559035468611{margin-bottom: 30px !important;}”][vc_column 0=””][vc_separator color=”custom” style=”dotted” accent_color=”#545353″][/vc_column][/vc_row][vc_row 0=””][vc_column 0=””][vc_column_text 0=””]글_김종헌(배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문화재위원)[/vc_column_text][/vc_column][/vc_row]더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