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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겨울 생색은 달력이라

‘하선동력夏扇冬曆’. ‘여름 생색은 부채요, 겨울 생색은 달력이라’라는 옛말이다. 더운 여름엔 시원한 부채를, 해가 바뀌는 겨울엔 달력을 만들어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면, 받은 이는 이를 큰 가보로 여겼단다. 널리 알려진 표현은 아니지만 민간에선 꽤나 오랜 동안 이 하선동력 풍습이 이어져 왔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그 자리를 대신한 부채와 달리, 달력은 여전히 유효한 ‘겨울 생색’이다. 연말연시를 맞아 가까운 이들에게 연하장과 달력을 선물하는 풍습은 거의 사라졌지만 요즘도 은행이나 기업체, 관공서 등에서 받아 온 달력이 많게는 십여 개씩 집안에 쌓인다.

 

추억의 달력을 넘기며

어릴 적 아빠가 어디선가 받아 온 달력을 거실 벽에 거는 순간은, 온 가족의 시선이 쏠리는 작은 이벤트였다. 지난해 달력을 벽에서 때어내며 “또 한 해가 갔구나”라는 아빠의 혼잣말이 얕은 한숨과 함께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것도 연례 행사였다. 성인이 된 그 아이가 마음에 드는 달력을 직접 골라 책상 위에 올려놓을 때, 그 옛날의 아빠처럼 한숨과 혼잣말을 내뱉는다.

일력 한 장을 뜯으면 하루가 시작되었다

서너 살 아이 키만 한 크기의 하얀 종이 맨 위 가운데에는 월을 표기하는 숫자가 쓰여 있고, 양 옆에는 지난달과 다음 달의 달력이 작게 들어가 있으며, 아래엔 요일에 맞춰 굵은 숫자가 표기된 달력은 가장 흔하고 기본적인 형식의 달력이었다. 태양력인 서양력에 맞춰 표기된 숫자 아래에는 작게 음력 날짜와 절기가 표기되어 있었으니, 지금도 대다수의 어른들은 이 음력 정보가 들어있어야 제대로 된 달력으로 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날그날 한 장씩 찢어서 넘기는 일력 역시 집집마다 하나씩은 꼭 가지고 있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다. 종이 한 장에 그날 날짜가 적힌 숫자만 들어가니 넉넉한 공간 안에 월과 요일뿐만 아니라 음력 날짜와 절기 등 그날과 관련된 각종 정보가 보기 좋게 큰 글씨로 쓰여 있어 특히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매일 아침 식구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일력 한 장을 뜯을 수 있는 영광을 얻었으니, 일력을 뜯어야 비로소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력은 30~40년 전만 해도 신문지와 함께 화장실 휴지로도 각광받았다. 얇은 종이를 구깃구깃 꾸기면 제법 부드러워져 그럭저럭 쓸 만했는데, 공중 화장실에도 새하얀 휴지가 넉넉하게 비치된 요즘 세상 젊은이들에겐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경악스런 옛날 얘기다.

특히 은행과 화장품 회사들은 홍보를 위해 달력에 공을 많이 들였다

 

1970년대 들어 디자인 달력등장

우리가 지금까지 애용하는 현대적인 형식의 달력이 널리 보급되고 상품화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의 일이다. 이때도 달력을 제작, 배포하는 곳은 비슷했으니 은행과 관공서, 기업 등이 자사 홍보물 차원의 달력을 만들어 무료로 일반에 나눠주는 형식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호프집 벽면을 수놓았던 여자 연예인의 화보성 달력을 비롯해서, 명화나 풍경 사진이 들어간 ‘디자인 달력’이 널리 등장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물론 1960년대에도 태현실, 엄앵란, 신성일 등 유명 영화배우의 사진이나 전통 그림, 풍경화 등을 넣은 잡지와 기업체의 홍보 달력들은 존재했다. 하지만 달력이 본격적으로 다양하고 화려한 치장을 하기 시작한 건 인쇄 기술이 발달하고 산업화와 함께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1970년대부터다. 달력이 공짜로 받는 것에서, 사는 것으로 인식이 바뀐 것도 이즈음이다. 유명 여자 연예인의 사진이나 서양화가의 작품 등이 인쇄된 예쁜 달력은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니, 충무로와 을지로 일대의 인쇄소와 달력 판매상도 전성기를 누린 시절이었다.

눈요기 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달력 속 미남 미녀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림 귀하던 시절, 액자 역할도

흑백 텔레비전과 흑백 신문의 시대. 컬러 인쇄물이라고 해봐야 달력과 포스터, 엽서 정도가 전부였던 그때, 연예인과 그림이 인쇄된 달력은 가정집이나 음식점 벽면을 장식하는 소중한 액자였고 중요한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그렇게 옛날 달력들은 대부분 벽에 못을 박고 거는 벽걸이 형태가 많았다. 지금의 탁상용 달력이 많이 등장하고 중심을 이루게 된 시작은 대기업의 VIP용 한정판 고급 달력이 생산되면서부터다. 1996년 삼성그룹이 마티스 달력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많은 그룹들이 피카소, 앤디 워홀, 백남준 등 유명 미술가 작품을 넣은 달력을 앞다퉈 내놓기 시작했다. 최고급 종이와 비싼 저작료를 지불해 만든 그 달력들은 기존 달력의 수준을 단번에 몇 차원 끌어올렸다.

 

이후 2000년대 초반 아시아 전역에 한류가 생기면서 배용준, 이영애 등 한류스타들의 사진이 담긴 달력들이 명동과 을지로 가게들의 입구를 빼곡히 장식했으니, 지금도 유명 배우와 아이돌 가수의 달력은 관광객들과 팬들의 시선을 끄는 인기 아이템이다.

 

1990년대 들어 탁상 달력 등 새로운 형태의 달력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최근엔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연말이면 한 아름 생기던 공짜 달력들도 조금 줄어든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기업들은 ‘한정판’ 고급 달력을 제작하는 데 열심이다. 유명 작가의 사진과 그림, 색다른 디자인으로 차별화를 꾀한다. 또한 인기 TV 프로그램이나 프로야구 구단에서 제작한 달력, 유명 연예인의 팬클럽이 직접 만든 달력 등 일부를 위한 고급 달력은 활발하게 생산되면서 여전히 사람들의 탁상 위를 장식하고 있다.

물론 한 장 한 장 넘기며 지난달을 돌아보고 새달의 희망을 생각게 하는 달력의 힘은 고급 한정판이나 공짜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엔 소중한 과거와 미래가 담겨있기 때문에.

 

 

글_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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