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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저장소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신혼여행의 변천사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그러자 주위에서 서로 기다렸다는 듯이 수줍게 종이봉투 하나씩을 건넨다. “두 인연이 하나의 열매를 맺고”, “두 사람이 하나의 이름으로”, “저희의 앞날을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문구가 가득한 청첩장이다. 부러운 마음을 감추며 청첩장을 받은 다음,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결혼 축하해! 그럼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현대인들에게 신혼여행은 아름다운 결혼식을 더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중요한 행사이다. 그래서 젊은 신혼부부들은 평생 한 번뿐인 추억을 남기기 위해 국내와 해외를 포함하여 신중하게 신혼 여행지를 택하고 일정을 짠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50~60대 이상에게 신혼여행 일화를 물어보면 대부분 3박4일 동안 둘러본 제주도의 이곳저곳을 말하기에 바쁘다. 그리고는 도깨비 도로의 신기한 광경,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며 예쁘고 건강한 아기가 나오길 빌었다는 이야기도 꼭 등장한다.

 

1992년,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며
건강한 아기를 낳기를 바라는 신혼부부(김범식 기증 영상 중 캡처)

1993년,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신혼부부(박점숙 기증 영상 중 캡처)

 

우리나라 신혼여행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1900년대 중반까지 신혼여행이라는 결혼식의 부대행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신식 결혼식이 널리 퍼지기 전, 혼례를 마친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는 신행新行의 관습과 남녀 두 개인보다는 집안 간 통합에 의례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20년 근대 여성 화가였던 나혜석1896~1948의 신혼여행은 국내 신혼여행의 초창기 모습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신혼여행 길에 첫사랑을 추모하는 비석을 세우고자 전남 고흥으로 신혼 여행지를 택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신혼여행은 국내외 사회적 흐름과 경제적 발전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1950년대까지는 도시에 거주하며 경제적 여유를 가진 중산층 이상만이 신혼여행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기에, 신혼여행은 사치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후 1960년대 초부터 국가 주도에 의하여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국민의 생활소득이 늘어나자 신혼여행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961년 재건국민운동본부가 발표한 『의례규범儀禮規範』 시안 중, “신혼여행은 형편에 따라서 가도 좋다”1)라는 규정은 신혼여행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1)“의례규범(儀禮規範)”: 『경향신문』 1961.08.28.

 

1962년, 진도-제주도-부산 등의 여정으로 이어진 신혼여행 경비 내역서(강신표 기증 자료),
국립민속박물관, 『배움의 길, 기록을 따라가다』, 2010, 181쪽.

1962년, 진도-제주도-부산 등의 여정으로 이어진 신혼여행 경비 내역서(강신표 기증 자료), 국립민속박물관,
『배움의 길, 기록을 따라가다』, 2010, 181쪽.

 

1960~70년대는 결혼식을 마치고 승용차를 타서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호텔에서 1박을 하는 신혼여행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서울의 남산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진을 찍는 대표적 명소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2)  당시 인기 있던 신혼여행은 온천(아산 온양, 대전 유성, 창녕 부곡, 충주 수안보 등)에서 휴양을 즐기거나, 산(속리산, 지리산 등)에 머물다 오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표적 신혼여행지 제주도는 1960년대부터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도 제주도 신혼여행의 항공료와 호텔 숙박비는 일반적인 신혼부부가 엄두를 낼 수 없는 고가였다.3)

 

2) “남山올라 高層숲에 셔터 누르고”: 『동아일보』 1972.09.15.
3)“결혼식 庶民은 簡素化, 上流는 變則”: 『동아일보』 1974.10.29.

 

1970년대 초반, 제주도 신혼여행을 위해 KAL기를 탑승하는 신혼부부(정상박 기증 사진)

 

이후 1980년대 초부터 몇몇 여행사가 관광객을 단체로 모집하면서, 신혼여행지로 제주도가 큰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 수요가 넘쳐나 제주도 신혼여행에 관한 모든 업무를 대행하는 전문 업체가 생겨날 정도였다. 당시 여행사들은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제주도 왕복항공료 인하, 관광버스와 항공기를 연계한 수송체제 마련, 제주도 내 호텔 가격 인하, 제주도 현지에서 사용 가능한 쿠폰 판매 등의 전략으로 많은 신혼부부 고객을 유치하였다.

 

1989년, 단체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신혼부부들(이미복 기증 영상 중 캡처)

1992년, 단체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물풍선 터뜨리기 게임을 즐기는
신혼부부들(임미양 기증 영상 중 캡처)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인하여 1990년대 초부터는 제주도와 더불어 해외로도 신혼여행을 많이 떠나기 시작하였다.5) 초기에는 우리나라와 근접한 대표적 휴양지인 태국, 필리핀, 괌, 사이판 등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이 인기 지역이었다. 이러한 추세는 1997년 IMF 사태로 인한 환율 급등으로 해외여행 경비 증가6) 및 사회적으로 해외여행을 자제하자는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7) 해외보다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는 현상이 늘기도 하였다.8) 현재는 해외여행의 문턱이 낮아져 미주와 유럽 등 신혼여행지가 전 세계로 다양해지고 있다. 또한 이전처럼 여행사에만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계획을 짜서 즐기는 자유여행의 방식을 선호하는 신혼부부가 많아지고 있다.

 

반면 번잡하고 시끄러운 해외여행보다는 다시 국내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속속 늘고 있다. 남들과 똑같은 관광지, 비슷한 사진 포즈, 여행사의 정형화된 신혼여행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방해하지 받고 제주도에서 올레 길을 걷거나 캠핑카를 숙소 삼아 멋진 풍경과 함께 하는 국내 신혼여행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신혼여행이 국내면 어떻고 해외면 어떠랴. 신혼여행은 소중한 두 인연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린 후, 시작하는 첫 번째 큰 행사이다. 그렇기에 신혼여행은 시간이 지나서도 잊지 못할 즐거움과 추억을 선사한다. 오늘 저녁, 사랑하는 가족들과 거실에 모여앉아 촌스럽기도 하고 풋풋하기도 하였던 그때 그 시절의 신혼여행 이야기를 당시 사진과 영상을 보며 나눠보는 건 어떨까?

 

4)“新婚여행 전문 알선업체 제주도 2泊3日 25萬원”: 『경향신문』 1983.10.19.
5)“신혼·수학여행 海外시대 활짝”: 『매일경제』 1989.01.31.
6)“태고의 신비 간직한 환상의 섬 제주도: 환율급등 영향 관광객 몰린다”: 『매일경제』 1997.11.13.
7)“신혼부부 해외여행 계획: 나라경제 생각 자제해야”: 『동아일보』 1997.12.17.
8)“IMF시대 제주관광 새풍속: 신혼여행 늘고 수학여행 감소”: 『동아일보』 1998.04.02.

 

[참고자료]

논저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일생의례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14.
박부진, 「신혼여행의 문화사: 새로운 통과의례의 시작과 현재」, 『한국문화인류학』 40-1, 한국문화인류학회, 2007.

 

신문

“의례규범(儀禮規範)”: 『경향신문』 1961.08.28.
“남山올라 高層숲에 셔터 누르고”: 『동아일보』 1972.09.15.
“결혼식 庶民은 簡素化, 上流는 變則”: 『동아일보』 1974.10.29.
“新婚여행 전문 알선업체 제주도 2泊3日 25萬원”: 『경향신문』 1983.10.19.
“신혼·수학여행 海外시대 활짝”: 『매일경제』 1989.01.31.
“태고의 신비 간직한 환상의 섬 제주도: 환율급등 영향 관광객 몰린다”: 『매일경제』 1997.11.13.
“신혼부부 해외여행 계획: 나라경제 생각 자제해야”: 『동아일보』 1997.12.17.
“IMF시대 제주관광 새풍속: 신혼여행 늘고 수학여행 감소”: 『동아일보』 1998.04.02.

 

 

글_황기준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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