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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인터스텔라〉와 ‘한약장’

2014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크게 흥행했다.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을 흥미롭게 해석한 이 영화의 후반부에는 미래에서 온 주인공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책장의 책을 떨어뜨리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책장’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의 문’과 같은 영화적 도구이다. 이 책장이 우리 한의사들에게는 ‘한약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약장’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근대 한의학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심벌symbol인 까닭이다.

한약장
과거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메시지

한약 처방은 바로 과거로부터의 메시지이다. 과거의 한의사로부터 현대의 한의사에 이르기까지 한약 처방은 고전古典에 근거한 ‘검증된 공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한의사들이 새로운 공식을 만들어내고 그 공식은 ‘처방’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한약 처방은 수학과 비슷하다.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조합combination단원처럼 한의학적 행위도 대략 150~200가지의 상용 약재 중에서 환자의 증상에 맞는 약을 골라내는 방법인 ‘방제학方劑學’을 사용한다. 동의보감에 있는 그 수많은 처방이 바로 한의학의 공식이다. 하지만 그 많은 공식 중에 병에 맞는 처방을 골라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똑같은 소화불량이라 할지라도 소화불량에 사용하는 수백 가지의 처방 중에 꼭 맞는 하나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한의사가 왕의 치료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처방은 곧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다. 따라서 치료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큰 처방은 의사 본인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자연히 도태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인 검증을 수백 년 이상 거쳐 온 것이 바로 현대 한의학이다. 과거의 정보와 기록을 바탕으로 현대의 한의사들은 과학적 정보를 배우고 보태 임상 현장에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삶의 형태나 환경이 변하면서 한약 처방 역시 과거의 공식을 새롭게 조합하거나 일부 수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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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정말 ‘새카만’ 한약이 많았다. 그때에는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여 생기는 병이 많아서 고농도의 영양물질인 숙지황熟地黃을 처방한 경우가 많아서다. 이 약을 달이면 아주 까만 한약이 된다. 반면 요즘에는 맑은 한약들이 많다. 현대인들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영양의 과잉섭취’가 더 큰 원인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이완하고 과잉 섭취된 영양소를 배출해주는 약들이 많이 처방되는 까닭이다. ‘새카매야 한약이지 왜 이렇게 묽으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다.

 

어제와 오늘을 잇고 오늘에 내일을 잇는
전통 문화 ‘한약’, ‘한약장’

한의학은 과거의 유산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실용적 전통문화다. 때에 따라 박물관에 찾아가야만 접할 수 있는, 일상에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가 아닌, 매일 매일 2만여 명의 한의사들이 임상과 치료에 적용하는 살아있는 유산. 처방전까지도 붓으로 세로쓰기를 했으니, 비록 흘림체 한자를 읽기는 힘들지만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이자 전통 유산으로 남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한의원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화 되어 이러한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 처방전은 처방 약재를 읽기도 편하고 저장도 용이한 전자 처방전을 쓰고, 침, 부항, 뜸 등은 모두 1회용 멸균 제품으로 바뀌었다. 한약장도 그렇다. 한의사마다 자주 사용하는 약재가 한정되어 있어서 다른 저장 방법을 선택하는 한의사들도 있지만, 한약장이라는 목가구 만큼은 한의원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그리고 약재를 보관하기 위한 근본적인 목적으로 여전히 과거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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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방문〉
여름 열병에 대한 처방으로 청폐탕을 내었으며 그것을 조제한 기록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시대가 흘러도 유용한 물건에는 ‘얼’이 이어진다. 한약장은 앞으로도 치료의 자원, 질병 치료의 비밀을 가득 안고 한의원의 한 벽면을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다. 각 시대의 쓰임에 맞도록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예술적 고가구古家具로서 그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을 것이다.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갑자기 한약장 서랍 하나가 툭 떨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과거의 선배 한의사가 한약장 뒤에서 서랍 하나를 밀어 나에게 병의 치료 비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상상이 더해져 이 우주 어딘가에 조선 시대의 의사로 살아가고 있는 또 하나의 나의 존재도 함께 떠올려 본다. 이론물리학자 카쿠Dr. Michio Kaku는 이런 말을 했다. “무수한 평행우주, 무수한 지구. 무수한 나가 존재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다른 우주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한약장, 그리고 한약장을 바탕으로 내일로 향하는 한의학.
한약장에 대한 글을 부탁 받고 우주를 꿈꿀 수 있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필자는 2014년 10월 개최된 허준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공동기획전 <약장, 건강을 염원하다> 전시도록을 살펴보고 이 글을 썼다. 이 전시는 서랍마다 가득한 약재들은 무엇이며 약재에 따라 약장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 그간 목가구의 범주에서만 다루어졌던 약장을 보다 면밀하게 살필 수 있는 장으로 마련되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형태로 변모한 다양한 약장의 모습을 통해 선조들의 정성과 지혜, 건강과 장수에 대한 소망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전시도록 <약장, 건강을 염원하다> – PDF

 

글_ 김영호 | 한의사
대구한의대 졸업. 현재 부산 공감한의원 원장으로 환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부산 한의사회홍보이사로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한의학의 가능성과 의미에 대해 알리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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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이정현 댓글: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림 에 청패탕은 청’폐’탕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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