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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의 추천

큐레이터 정연학이 추천하는 한국의 벼 타작 농기구

무논은 비어깔고 전답은 비두다려
습한 논은 베어 깔고 마른 논은 메 두드려오늘은 정근벼요 내일은 사발벼라
오늘은 점근벼요 내일은 사발벼라

밀따리 대초벼와 등트기 경상벼라
밀따리 대추벼와 동트기 경상벼라

들에는 조피떠미 집가에 팥콩까리
들에는 조 피 더미 집 근처 콩 팥 가리

벼타작 마친후에 틈나거든 두다리세
벼 타작 마친 뒤에 틈 나면 두드리세

비단차조 이부꾸리 매눈이콩 황부대를
비단차조 이부꾸리 매눈이콩 황부대를

이삭으로 먼저잘라 후씨로 따로두소
이삭으로 먼저 잘라 종자로 따로 두소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 「구월령九月令」 중에서

개상질 부분도(경직도)
농사짓는 일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일을 그린 풍속화인 <경직도>
개상질(타작)을 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벼의 알곡을 타작하는 데 쓰는 연장으로는 ‘벼훑이’, ‘개상’, ‘그네’ 등이 있다. 벼훑이는 두 개의 가는 나뭇가지나 댓가지의 끝을 동여매어 집게처럼 만들어 벼이삭을 그 틈에 끼고 오므린 다음 벼 알갱이를 훑어내는 연장이다. <해동농서海東農書>의 ‘도저稻箸’가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벼훑이는 단순한 도구이기에 수확한 벼보다 수확을 앞둔 벼 가운데 일찍 영근 낟알을 선별적으로 수확할 때 주로 사용하였다.

콩이나 깻단을 털어낼 때는 도리깨를 이용하지만, 벼를 타작할 때는 ‘개상’이라는 연장을 이용한다. 개상의 형태는 통나무를 이용하거나 여러 널을 댄 틀의 형태로 개상질은 적게는 4명, 많게는 6~8명이 한다. 조선 시대 <경직도耕織圖>를 보면, 개상질을 하는 사람, 멍석 밖으로 나간 벼 낟알을 빗자루로 안쪽으로 몰아넣는 사람, 개상질을 마친 볏단을 묶는 사람, 삽으로 낟알을 섬에 담는 사람 등 일련의 과정을 그림으로 담고 있다.

‘그네’는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틀을 몸체에 끼우고, 그것을 네 개의 다리가 받치고 있는 연장으로 우리나라 생활사 박물관이면 어느 곳에서나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제 그네가 우리나라의 전통 농기구로 오해하고 있고, 그 용도가 과거 벼훑이와 유사하여 ‘훌치기’, ‘홀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상

개상. 고여놓은 통나무에 곡식의 단을 내리쳐서 알곡을 떨어낸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그네

그네. 한쪽 발로 발판을 밟아 단단히 고정한 홀태에 곡식의 이삭을 먹여 잡아당기면
낱알이 훑어진다.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한국 농기구는 조선 후기까지 전통 재래농기구가 사용되었으나 20세기 초 일제농기구가 유입되면서 재래농기구와 일본의 농기구가 공존하였다. 조선 시대 600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던 것이 일제강점기 40년 만에 일부 농기구가 대체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일제농기구의 상품화 정책과 무관하지 않은데, 1906년부터 일본은 그네稻扱機, 도급기 등의 일부 농기구를 무상으로 분배하였고, 1909년 통감부에서 배부한 농기구를 보면 그네가 1,026개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일제는 한국의 타작도구인 개상과 벼훑이 단점을 지적하면서 지속적으로 보급정책을 펼치어 그네가 한국 농가의 필수 연장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그러나 그네는 일제 발탈곡기가 등장하면서 보급이 감소되었고, 탈곡기는 기능은 좋으나 가격이 비싸 우리나라 중농 농가 이상에만 한정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네와 발탈곡기는 1970년대 자동탈곡기가 보급되면서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었고, 자동탈곡기도 1990년대 곡물을 베고, 이어서 탈곡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콤바인이 등장하면서 그 자리를 내주었다. 한국의 탈곡 농기계 등장은 과거 품앗이 등의 전통풍속이 자연스레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발탈곡기

발탈곡기. 발로 밟아 벼를 턴다.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콤바인 이용 및 작업모습

콤바인. 농작물을 베는 일과 탈곡하는 일을 동시에 한다.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글_ 정연학 |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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