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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의 추천

큐레이터 김윤정이 추천하는 김종헌의 <문자도>

<문자도>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즉, 조선시대 근간이 되는 사회유리덕목을 한자로 쓰고, 각 글자와 관련된 고사의 상징물들을 직접 그리거나, 자획의 하나를 상징물로 대체해서 그린 독특하고도 재미있는 그림이다. 이른바 ‘민화’로 불리는 그림들이 그렇듯 <문자도> 역시 누가 그렸는지 알려진 그림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여기에 소개하는 김종헌 필 <문자도>는 크기나 형태, 장황의 상태까지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다.

 

2006년 처음 이 <문자도>가 박물관에 들어왔을 때 언뜻 보고는 매우 특이하고 재미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문자도> 관련 글을 의뢰 받고는 소장품을 다시 찬찬히 보면서 재발견한 그림이다.

 

김종헌 필 <효제문자도>는 국립민속박물관이 2006년 공개 구입을 통해 수집한 그림으로, 낙폭 없이 여덟 자, 총 8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먹으로 글자를 쓰고 자획 안에 관련된 고사의 장면을 그려 넣은 형식인데, 일반적인 문자도에 비해 자획이 커서 장중한 느낌까지 준다. 특징적인 것은 그림의 둘째 폭 ‘제’자의 그림 안에 ‘김종헌수필金鍾憲手筆’이라 쓰여있고, 1폭에 ‘김종헌이가 떠치난 붖트로 대국서 나온 펑풍보고 한 혹 한 점도 툴임업시 긔리까고 이평풍을 꾸미른바김종헌이가 떨치는 붓으로 대국서 나온 병풍을 보고 한 혹 한 점도 틀림없이 그려서 이 병풍을 꾸미는 바’라는 문구와 8폭의 아래 단 설명문 옆에 ‘김종헌리 뿌트로 맞치다.김종헌이 붓으로 마치다.’ 라고 하여 김종헌이 그렸음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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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폭에 적혀있는 ‘김종헌이가 떠치난 붖트로…'(왼쪽), 2폭에 담긴 ‘김종헌수필 金鍾憲手筆'(가운데),
8폭의 ‘김종헌리 뿌트로 맞치다'(오른쪽)에 이르기까지 김종헌의 흔적이 곳곳에 담겨있다.

장황에 그림의 연원에 대해 쓴 것도 이 <문자도>에 흥미를 더하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 옹정 6년 옹정황제가 조선의 조공朝貢에 대한 회사품回賜品으로 영종영조에게 보낸 병풍을 김종헌이 베껴 그린 것이다.

 

영종은 무신난戊申亂1728년이 평정되고 난의 진압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내렸는데, 이것이 『양무원종공신녹권揚武原從功臣錄券』이다. 하양河陽 김부장金部將 석후碩垕, 김석후도 이때 일등공신에 책봉되어 녹권 한 권과 병풍 한 개를 받았는데, 이 병풍을 보고 김종헌이 한 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그려 병풍으로 꾸몄다’는 것이다. 『하동군지』에 의하면 부기에 나오는 ‘김석후金碩垕’는 ‘김석구金碩垢’로 표기되어 소개하는데, 김석구는 본관이 김해이고, ‘이인좌의 난’ 때 선전관으로 영조를 호위하여 양무원종일등공신이 되었다.1) 어모장군 전라우후를 지냈으며, 금부도사에 추증 되었다고 한다.

 

그림의 연원이 된 원본은 청나라 옹정기까지 그 시기가 올라가지만 부기의 표기법과 그린 이의 설명문에 의하면 이 <문자도>는 20세기 초에 다시 그려진 병풍이다. 그림의 연원이 되는 때로부터 실제 그려진 시기의 차도 많고, 언급된 인물에 대한 기록도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 그림의 연원에 대해서는 구전되어 오던 것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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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문자도>는 사료적 가치에 있어 크고 작은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 언젠가, 김종헌이란 사람은 최선을 다해 그림을 베껴 그렸고, 구전되어 오던 그림에 대한 사연도 꼼꼼히 적어 두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문자도>라는 그림뿐 아니라 이러한 종류의 그림에 대한 소문까지 백여 년이 지난 지금 들을 수 있었다. 민간에서의 구전口傳에 대해 정확성을 따진 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에 영향을 주면서 이어져 오는 것이 민간에서의 ‘풍속’이고 그것이 곧 ‘민속’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종헌 필 <문자도>는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고 존재했었는가에 대한 민속을 전해주는 특별한 그림이다.

1) 당시의 공신녹권을 보면 김석후는 일등공신이 아니라 이등공신에 올라있어 하동군지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글_ 김윤정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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