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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민속보고서

머구리, 해녀, 그리고 박물관

갈남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꽤 멀었다. 대관령을 넘어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또다시 바다가 얼굴을 내밀었다 숨었다 하는 국도를 따라 1시간여를 달렸다. 드디어 잔뜩 굽어진 해안도로 아래에 살짝 가리워져 있어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삼척시 원덕읍 갈남항이다. 마을에는 94가구 160여 명이 모여 산다는데, 사람 모습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쌍등대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갯바위에 자리잡은 갈매기 울음의 향연, 그 태고적 소리만이 퇴락한 어촌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들어 온 것이 있다.

 

방파제 너머 지척인 월미도越美島는 1,3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특별한 신화의 현장이다. 아름다운 여인이 넘어간 섬이라 <삼국유사>는 전한다. 신라 성덕왕 시절,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되어 가던 길에 이 곳에 살던 해룡이 천하절색의 수로부인을 납치해 갔으나 마을 어부들이 입을 모아 해룡을 공갈하여 부인을 구출한다. 우리 귀에도 익은 <해가사 海歌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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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 얼마나 크던가
만약 이를 거역해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통째로 구워 먹으리라.

 

중구삭금衆口鑠金, “사람의 입이 모이면 쇠도 녹일 수 있다”고 했던가? 여론의 승리일 뿐 아니라, 뱃사람들이 떠받드는 용왕에 맞서면서까지 남의 불행에 힘을 보태던 이곳 선인들의 용기와 심성이 갸륵하다. 그 후손들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니 불현듯 살갑다.

 

허나 언뜻 돌아보니 우리가 기대했던 박물관은 없다.
박물관이라면 의례히 초현대식 위용을 갖추거나 고풍스런 분위기를 연출하여 찾는 이들의 진중한 자세를 은근히 유도하기 마련인데, 그런 근사한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대여섯 평의 허름한 아이보리색 단층양옥 담벼락에 붙어있는 “삼척갈남마을박물관”이란 안내문을 보고서야 여기가 우리가 그 멀리서 찾아온 곳임을 알았다.

 

출입문마저 닫혀있어 그 건물에 달린 본채 대문을 거쳐 잠입하듯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출타중임에도 집 대문과 박물관 뒷문이 열려 있으니 누구든 원하면 자유롭게 보라는 뜻이리라. 실내는 더욱 조악했다. 과거 동해안 해산물 양식의 메카로 불리던 때, 우렁쉥이멍게, 조개류의 종묘를 배양하던 양식용 시설물인지라 시멘트로 칸막이를 해놓은 좁은 공간마다 그 시절의 어민들이 썼을 법한 이런 저런 어구들과 각종 기록물들이 여기 저기 널려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둘러보곤 내심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소싯적에 3년 여간 어선을 타 보았다는 동행자는 달랐다. 진열품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피고 직접 만져보기도 하면서 잔뜩 감회에 젖는 눈치다. 모습이 자못 진지한지라 왠지 살짝 미안해 지려하는데, 그가 한마디 툭 뱉는다.
“과거 어민들의 희노애락이 모두 깃들어 있는 듯 하구먼.”
“어렵던 시절, 하루하루 살기 위해 배를 타고 물질 하던 사람들에게 화나고 슬픈 일들이야 많았겠지만 기쁨이나 즐거움인들 뭐 있었을라구.”
내가 대꾸하자, “아무리 힘들어도 나름의 기쁨은 있지 않았겠느냐”며 풀어내는 그의 옛 이야기들은 흥미로우면서도 숙연한 내용들이었다.

 

일단 출항하면 만선을 위해 길게는 3개월 정도를 망망대해에서 거친 파도와 사투를 벌이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물이 모자라 제대로 씻지 못하는데다 급기야는 갈증과 싸워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또 하나, 그토록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고기를 가득 싣고 귀항하는 순간 다가오던 개선감은 뱃사람만의 것이었을 테고, 그렇게 해서 받던 몇 푼의 노임 또한 오늘날 남을 속여 가며 수백 배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의 쾌감과는 뿌리부터가 다른 것이었다고 설파한다.
표현은 날 것이었지만 뜻은 한없이 깊었다.

 

어느덧 초라하게만 여겨지던 그 박물관 진열품 하나하나에 애틋한 눈길이 가고 마치 감추어진 보물의 속살을 들추어 보듯 진지한 자세로 돌아섰다. 그 곳에는 버거운 세월을 옹골차게 살아낸 머구리와 해녀들의 흔적들이 오롯했다. 남자 잠수부인 머구리들이 쓰던 시커먼 헬멧은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묵직한 것이 마치 옛날 무사들의 투구를 닮아 있었다. 하기야 당시 그들에게는 저 깊은 바닷속도 생사를 가르는 비장한 전쟁 터였을 테니 다를 바 없었으리라.

 

동영상 모니터를 틀자 연신 흘러나오는 제주도 출신 해녀 할머니들의 노랫가락은 그 가사와 뜻을 알 듯 모를 듯 생소하지만 그들의 구절양장九折羊腸한 인생의 굽이굽이를 담아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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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남마을박물관 도록 중 『최병록·진숙희 부부의 살림살이』 재현 모습. 연대별 살림 살이의 특징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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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라 저어라 만물은 가지말고 갈남으로 올라하이
썰물은 터져라…………니나 나나 한배를 탔네”

 

수십 년 전 동해안 명태잡이 어선들의 모항母港이요, 자연산 미역을 비롯한 각종 해산물의 보고寶庫라는 명성을 좇아 제주에서 이리로 왔다. 그리고는 이곳 총각들과 눈이 맞았다. 바닷길이 곧 혼인길인 셈이었다.

 

이 소박한 박물관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뱃사람들은 그저 거칠고 투박하다는 편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곳에는 그저 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꼼꼼히 적어 내려간 어가 경영일지, 빛 바랜 신문기사, 윤곽도 희미해진 흑백사진, 수산관련 옛 기록물들은 그들이 맞닥뜨려온 삶에 대한 열정과 치열함을 웅변하고 있다.

 

두 시간여 동안, 보고 듣고 느낀 후 밖으로 나와 건물 외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초라하다. 그러나, 저 안을 채운 옛 이야기들은 갈남마을에 터잡고 살아가는 주민들과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시간 여행을 풍요롭게 하는 보물들이다.

 

그렇다. 2014년 7월에 개관한 “삼척갈남마을박물관”은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월의 흔적들을 담아낸 문화적 보고다. 박물관이란 외양이 번듯하고 대리석 정도는 깔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시대가 만들어낸 편견일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동해 무릉계곡에 들렀다. 천여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다는 너럭바위가 장관이다. 거기에는 옛 시절, 수많은 풍류객들이 남기고 간 각자 刻字가 어지럽다. 유독 한 사람의 이름이 확 다가온다. 조선조 정조시절, 삼척부사를 지냈던 유한준이다. <석농화원>의 발문에 설파한 그의 명언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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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사랑하게 되고 知則爲眞愛,
사랑하면 그때 진실로 보이리라 愛則爲眞看

 

조금 전 떠나온 갈남마을, 그곳 박물관을 살피고 난 후의 내 마음을 어쩜 그리 잘 표현했을까? 정겹고도 애틋한 느낌, 그 여진이 길고도 깊다.

글_ 홍인희 |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 초빙교수
긴 시간 문헌을 찾고, 지역 어르신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한반도의 숨겨진 모습을 연구해왔다. 10년여 년간 강원도에 살면서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발견한 강원도의 본모습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두 번째」, 「배움도 깨달음도 길 위에 있다」공저 등이 있다.
필자는 조사보고서 <큰섬이 지켜주는 갈남마을>을 살펴보고, 직접 ‘갈남마을박물관’을 찾아 현장을 둘러본 뒤 이 글을 썼다. ‘2014 강원민속문화의 해’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갈남1리 상주조사의 수집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이 보고서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조사보고서 <큰섬이 지켜주는 갈남마을> – PDF
| 전시 도록 <삼척 갈남마을 박물관> – PDF
|국립민속박물관 기자단 워크샵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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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이준석 댓글:

    90년대 초반 대학교 복학생때 동해안 영덕에서 ‘머구리’ 조사를 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어렸을 때 머구리에 대한 기억은 만화 ‘미래소년 코난’에서 비롯되었고,
    최근에는 슬픈 세월호 사건과 웹툰 ‘파인(巴人/ 윤태호 글과 그림)’을 통해서 …
    추억을 되새겨보게 해주신 조사보고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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