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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단상

벼루에 미치다

 

예부터 선비는 재물을 탐하는 것은 부끄러워했지만, 좋은 문방사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랑으로 여겼다. 이근배 시인 역시 자신은 벼루에 미치고 먹에 바보가 되는 ‘연벽묵치硯癖墨癡’라고 말한다.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운 그는 서른 살 넘어 붓글씨를 다시 쓰고 싶어지자 좋은 벼루를 사러 다녔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 1973년 창덕궁에서 문화재관리국이 개최하는 벼루 전시회가 열렸다. 수백 점의 작품을 보며 벼루가 단순한 문방사우가 아니라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사동 고서상에 유명한 중국 단계 지역 벼루를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뒤 좋은 벼루를 구했다는 연락이 왔는데, 값이 자그마치 1백만원이라고 했다. 당시 집 한 채가 약 2백30만원이었으니, 1백만원은 엄청난 돈이었다. 벼루의 멋에 취한 이근배 시인은 친한 출판사 사장에게 돈을 융통해 첫 번째 벼루 ‘구욕용봉연’을 수집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한동안 중국 벼루에 빠져 중국까지 가서 벼루를 모으던 그는 우리나라 벼루가 한·중·일 벼루 중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 나라의 도자기와 의복이 다르듯, 벼루 또한 너무나 다르다. 주로 압록강 유역 위원 지역과 보령 남포 지역의 돌로 만드는 우리나라 벼루는 섬세하게 조각한 문양이 감탄을 자아낸다. 위원의 돌은 팥색과 녹두색이 켜켜이 쌓여 풀과 꽃이 어우러지는 것 같아 ‘화초석花草石’으로 불리며, 남포의 돌은 밤하늘처럼 깊고 검다. 우리나라 벼루의 황홀한 예술성에 비하면 중국와 일본의 그것은 단순하기 그지 없다. 일본 벼루 전문가 요시다 긴쇼는 저서에서 ‘위원 화초석으로 만든 한국의 벼루는 기교가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예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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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지독한 사랑, 혹애

“시는 사람의 생각이 우주의 자장을 뚫고, 만물의 언어를 캐내는 것입니다.” 만약 시인 이근배가 벼루를 수집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벼루에 대한 끔찍한 사랑, 즉 혹애惑愛가 시상에 주는 영감은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이 아름다운 벼루들은 고고한 선비와 왕가에서 사용한 것이다. 이런 귀한 물건이 수백 년을 지나 내게 왔으니 얼마나 인연이 깊은 것인가.’ 벼루는 여러 선비를 거치며 시문을 짓고 상소문을 쓰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문인들의 역사와 시간을 담은 벼루의 문양과 정신은 그에게 시가 되고 철학이 된다.

 

“수석이 바람과 물이 만든 신의 조각이라면, 벼루는 인간의 손을 빌어 만든 신의 조각이지요.” 벼루는 ‘연전硯田’이라고 불린다. 연전은 시인詩人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미술가 김창열이 물방울에 천착하듯 시인 이근배는 벼루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작은 벼루에 온 세상이 담겨 있으니 어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벼루의 미를 예찬한 시가 한 권의 책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하는 거/ 하나쯤은 있어야 사람이지/ 사람, 아니면 / 책이나 그림 따위 아무 거라도/ 목숨보다 아낄 줄 아는 게 사랑이지(중략)’ (시 「혹애」 중)
시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이근배는 벼루 수집을 통해 시상을 얻고 영감을 받는다. 이야기를 캐내고 역사를 재구성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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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근배가 수집한
대표적인 벼루들

 

벼루 수집의 희로애락

벼루 수집에 얽힌 그의 사연을 하나 들어보자. ‘정조대왕사은연’은 시인을 벼루 수집가로 만든 창덕궁 벼루 전시회에서 그를 매료시킨 18세기 청나라 시대 작품이다. 물고기와 용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정조가 대재학 남유용에게 이것을 하사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20여년 뒤, 전시된 벼루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것 하나라도 갖고 싶다고 생각한 그의 손에 그 최고의 벼루가 쥐어졌다. 미국으로 팔려간 ‘정조대왕사은연’을 한 기업가가 다시 한국으로 가져왔고, 사업이 어려워진 그가 경매에 내놓은 그 벼루를 시인이 발견한 것이다.
40여년 동안 1천여점의 벼루를 수집한 그는 세계 최고의 벼루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세계의 어떤 박물관도 벼루 전시를 하려면 그에게 작품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의 벼루 전문가들도 그의 수집품을 보고 감탄해 한숨만 쉬었을 정도다. “나는 대리석 안에 들어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가 나올 때까지 돌을 깎아냈습니다.” 대리석으로 아름다움을 깎아낸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도 조선의 벼루를 보면 반할 것이라고 시인은 자신한다.

 

물론 벼루 수집이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빚을 내서 작품을 구입할 때도 많았다. 돈 벌려고 수집하는 것이 아니니 급전이 필요해도 벼루를 팔지 않았고, 팔기가 싫어 고생도 많이 했다. 덕분에 이제 시인 이근배와 벼루는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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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는 우리나라 미술사를 다시 쓰기 위해 벼루 컬렉션을 정리하고 있다. 벼루에 대해 그만큼 많이 아는 사람이 드무니 누구의 도움도 바라기 어렵다. 벼루를 사랑하고 공부하는 시인 이근배의 고독을 응원한다.

인터뷰_국립민속박물관 웹진 편집팀
사진_정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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