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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브랜드를 디자인하다

LED가 조명 시장을 장악한 시대에 오래된 백열등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브랜드가 있다. 반백 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일광전구가 그 주인공. 그런데 일광전구의 이런 혁신 뒤에는 브랜드 이미지를 총괄하는 ‘브랜드 디자이너’의 도전이 숨어 있었다. 긴 안목으로 찬찬히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사람. 064 디자인 컨설팅 스튜디오 권순만 대표를 만났다.

 

Q. ‘브랜드 디자인’이란 개념은 아직 생소하다

권순만_단어가 낯설 뿐이다. 일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보면 된다. 브랜드 디자이너는 한마디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렇게 064는 제품 디자인을 베이스로 브랜드 디자인을 하는 회사라고 보면 된다. 로고, 제품, 제품의 패키지, 홈페이지, 사진, 전시 공간 등 상품을 둘러싼 모든 시각적 콘텐츠를 관리하는 것이다. 브랜드를 총괄하다 보니 브랜드의 서비스, 마케팅, 영업 시스템 등에도 관여하게 된다.

 

Q.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작업의 지평을 넓힌 계기가 궁금하다

권순만_어려서부터 산업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해 디자인 스튜디오에 입사했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디자인 회사지만 그때는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였다. 그러니 입사해서 편하게 디자인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제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그래픽, 패키지 디자인, 각종 인쇄물 제작에, 하다못해 사진도 직접 찍었다. 그땐 정말 힘들었지만 4년을 일하고 나니 이 일에 관한 생각의 지평이 넓어졌다. 산업 디자인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모든 과정에 얽힌 다양한 분야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2014년 독립해 064라는 디자인 컨설팅 스튜디오를 차렸다.

 

 

Q.  ‘064’라는 이름은 어떤 뜻인가?

권순만_제주도 지역번호다. 회사 다닐 때 한창 제주도 여행을 많이 갔다. 사진도 찍고 캠핑도 하면서 많은 이들이 그랬듯 제주의 매력에 푹 빠졌다. 단순히 좋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더라. 그래서 제주의 자연에서 사는 것이 나의 꿈이 되었고, 제주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선 일단 내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웃음).

 

Q. 제주의 자연에 매료된 디자이너의 디자인 철학이 궁금하다.

권순만_전체적으로 자연을 추구하는 건 맞다. 롱라이프Long-life 디자인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오래갈 수 있는 디자인을 하겠다는 생각이고, 그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064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일광전구를 브랜딩 하면서 정말 많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했다. 제주도의 숙박 업체 ‘토리코티지’와 함께 일광전구의 브랜드 철학이 결합된 ‘토리코티지 × 일광전구’의 건축, 인테리어, 가구, 토탈 브랜딩까지 전담해 진행하기도 했다.

 

Q. 권순만이란 이름은 일광전구와 함께 주목 받고 알려졌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권순만_2014년에 독립하고 지인의 소개로 일광전구 김홍도 대표를 만났다. 처음엔 제품 박스 디자인을 하나 맡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기 전 프로젝트 스터디를 해보니 백열전구가 정말 사양 산업이었다. 제품 생산으로는 국내 하나 남은 회사…. 어떻게 보면 비전이 거의 없었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 조명은 시계, 의자 같은 것들과 함께 꼭 하고 싶은 아이템이었다. 해외 유명 기업들처럼 멋지게 만들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일광전구 브랜딩 작업은 권순만의 숱한 고민과 제안 끝에 불이 커졌다

 

Q. 그 목표를 설득하고 공유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권순만_다행히 대표님도 고민이 많은 상황이었다. 뭔가 상황을 돌파하고 싶은데 그 방법은 미궁이던 상황에 마침 내가 브랜드 디자인 제안을 한 거다. 첫 의뢰를 받은 패키지 디자인에 할애한 시간이 10퍼센트라면, 나머지 90퍼센트는 브랜드 리뉴얼 제안서를 만드는 데 썼다. 매번 만날 때마다 PPT 제안서를 만들어 보여주면서 설득했다. 그때 만든 제안서만 30개가 넘었다.

 

Q. 일광전구 작업의 메인 콘셉트는 무엇이었나?

권순만_064 디자인 철학과도 겹치는 부분인데, 앞서 말한 롱라이프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보통 오랜 역사를 가진 기업이 젊은 디자이너들과 작업하면 굉장히 혁신적이거나 엄청 튀게 해서, 아주 젊게 만들어버린다. 캐릭터를 과감히 넣는다든지 ‘키치한’ 제목을 붙인다든지. 너무 많이 변해버리는 거다. 당장 사람들의 시선은 사로잡겠지만, 그런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광전구는 해외의 오래 된 브랜드들처럼 진중하고 묵직하게 다가서고 싶었다. 장난스럽지 않게, 좀 무겁게.

 

 

Q. 최근 인천에 문을 연 라이트하우스도 그런 콘셉트로 작업한 공간인가?

권순만_그렇다. 일광전구 브랜드가 주목을 끌면서 쇼룸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가 많아졌다. 처음엔 당연히 을지로로 생각을 했다. 을지로는 조명의 메카이고, 일광전구 제품이 가장 많이 유통된 공간이니까. 그런데 땅값이 너무 비쌌다(웃음). 고민하던 차에 동인천 개항로라는 곳을 찾았다. 그곳엔 우리나라가 처음 개항했을 시기, 가장 번성했던 시기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숨 쉬고 있었다. 개발에서 소외되어 오히려 최초의 백화점, 최초의 극장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곳에서 한동안 방치된 병원 건물을 우리의 카페 겸 쇼룸으로 꾸몄다. 기존의 오래된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최소한의 리모델링만 했다.

 

Q. 라이트하우스는 쇼룸이기 전에 카페로 보인다.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나?

권순만_일반적으로 기업에서 쇼룸을 만들면, 정말 제품을 빼곡하게 전시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공간에 동화되도록, 세련되게 드러내고 싶었다. 카페로서의 기능에 충실해야 하고, 커피의 맛도 최고여야 했다. 결과적으로 매우 세련된 쇼룸이 탄생한 것 같아 기쁘다. 사람들의 반응도 좋다.

 

Q. 일광전구 이외에 다른 작업들도 궁금하다

권순만_지난 4년간 30~40곳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대부분 제품 디자인과 브랜드 디자인데, 제주의 토리코티지처럼 렌탈하우스의 공간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최근엔 국내 매출 1위의 위스키 브랜드 패키지 디자인을 하고 있다. 일광전구처럼 처음엔 제품 패키지 디자인 의뢰를 받은 것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다양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위스키는 꼭 디자인하고 싶었던 제품인 만큼 앞으로 일광전구 같은 토탈 브랜딩 작업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권순만은 마트에서 구입한 생필품 패키지 등에서 영감을 얻는다

 

Q.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실행력도 남다른 것 같다

권순만_나는 이것저것 바꿔가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작업을 펼쳐나가는 것이 좋다. 최근엔 한식 셰프와 손잡고 레스토랑을 열기 위해 작업 중이다. 064의 디자인 영역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생활용품에서부터 상업공간에 이르기까지 아주 넓다.

 

Q. 영감의 원천을 하나만 이야기해준다면?

권순만_작업의 방향이 주로 생활용품을 아름답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해외 고급 마트를 많이 간다. 예전에는 유명 디자이너의 전시나 잘 해놓은 쇼룸 위주로 보러 다녔지만 요즘은 그보다 마트나 재래시장을 자주 가게 된다. 그 나라의 진짜 모습, 생활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소금, 마요네즈 같은 생필품 패키지 중 눈에 띄는 것들을 샘플 삼아 정말 많이 구입해 와서 사용해 본다.

 

Q. 같은 진로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권순만_‘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친구들이 대기업 입사를 꿈꾼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안정을 추구하는 자세는 사실 디자인을 하는데 굉장한 제약이 되기도 한다. 내가 지금 후회가 되는 것은 대학 시절 과 안에서만 머물렀다는 점이다. 동아리 활동도 하고, 다른 학교 친구들이랑 협업도 했다면 훨씬 유연한 사고로 다양한 작업에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내가 잘 되어야 한다(웃음). 후배들에게 나처럼 도전하는 선배가 잘 된 선례를 만들어줘야 하니까.

 

 

Q.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바람이나 꿈이 있다면?

권순만_어찌 보면 마케팅은 회사가 출시하는 제품의 현재 판매고를 끌어올리기 위해 비용과 투자를 하는 활동이라면 브랜드 디자인은 현재도 있지만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리는 활동에 가깝다. 나는 사람들이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와 가치를 더 진득하게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본다. 5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일광전구가 그것을 조금씩 이뤄내고 있는 것처럼 비슷한 사례들이 국내에 많이 생겨나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 일광전구 같은 브랜드를 5개 정도 더 하는 것이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나의 꿈이다.

 

 

글_편집팀
사진과 영상_W l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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