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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不老口

잡탕의 매력, 부대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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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_ 신예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여행과 음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 〈여행자의 밥 1, 2〉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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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백현미 댓글:

    우리어릴때 짜장면집하면 으례 떠오르는것중에 하나가 짜장면집 입구에 달려있는 구슬 술달린 가리개입니다
    그 가리개를 뚫고 지나가야만 비로소 신비의 세계가 펼쳐지지요
    입학 졸업식에만 갈 수 있었던 곳이기에 짜장면집 지나가면서 술 달린 가리개 건너편이 어찌나 그립고 가고싶었는지 얼른얼른 오빠나 동생이 졸업하고 입학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곤했었는데…
    그 구슬달린 가리개 우리집에도 설치하고싶네요 ㅎㅎ

  2. 최희선 댓글:

    짜장면! 지금도 맛있고 어린시절은 더 맛있었지요~
    제 추억의 짜장면 역시 국민학교(요즘 초등학교) 졸업식입니다. 더 어렸을때 먹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나이먹지 않은 제 기억으론 그날이 처음이었던것 같아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댁에 우리는 살게 되었었죠. 졸업식에 저는 아무도 안올것을 알고 있었고 그냥 집으로 가려는데 이름도 기억 안나는 동창(그땐 친구라 생각 했지만 ^^) 어머니께서 같이 밥먹자 해서 간곳이 동네에 하나뿐인(그래도 제법 컷던 집으로 기억해요)짜장면집이었어요~ 들어서는데 냄새가 너무 좋아서 홀에 있는 테이블을 하나하나 보았더니 다 까만 국수를 먹는데, 손님들이 들어와도 신경들도 안쓰고 맛있게 먹는 모습에 제 입에 침이 절로 고이더라구요. 저희 일행은 방으로 들어가게 됐고 묻고 따질것도 없이 똑같은 음식이 나왔어요, 친구 엄마라지만 그날 처음 뵙는 거라 얻어먹기 쑥스러워 고개만 까딱 인사하고 먹기 시작!
    헐 ~ 다먹었네!
    그땐 양이 많았을 까요? 배는 부르더라구요 ㅎㅎ 그래도 더 먹고 싶다!
    그때 봤어요! 제 양말이 뚤려 있는 것을.. 아 챙피하다. 이생각만 하고 얼른 먼저 빠져나와 뛰어서 집에 갔던 기억이 나요.식구들에겐 당연히 비밀이었구요. 생각해 보니 아직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네요 ㅎㅎ 그 후론 저희 집도 일 년에 한번씩은 짜장면을 먹으러 나갔던것 같아요. 저는 분명 800원으로 기억합니다.^^,그 뒤 1200원, 1500원 … 짧은 기간에 자꾸 올랐던것 같아요 , 그래서 한 동안 또 못먹고 지냈지요.

    아무튼, 친구 어머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감사 인사 드리게 되네요~

    몇 년에 한번씩 고향에 가면서 그 길을 지나가지만 그 짜장면 집은 없어져서 아쉬워요. 맛있었습니다. 그때 그 장면은 참 부끄러우면서도 오래갑니다.
    짜장면 시켜 먹고 싶네요. 질리지 않는 마법같은 짜장면 ! 아! 좋아요!

  3. 황영미 댓글:

    추억의 짜장…
    어릴적 기억을 빌리자면, 졸업식이나 입학식이면 그날은 짜장면으로 외식을 했다. 손꼽아 기다리는 날였다..
    그 시절 오백원였던 짜장면은 형편이 넉넉치 못했던 우리에겐 값비싼 음식이였다. 자주 먹을수 없던 그런…언제던가, 너무 먹고 싶어서 동생이랑 몇 달간 용돈을 모아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한 그릇을 시켜 나눠 먹던.. 그런 우리를 지켜 보던 주인 아줌마가 밥 한 공기를 그냥 주셔서 남은 소스에 비벼먹던 모습.. 그때 그 시절.. 짜장면.. 나의 추억속 음식.. 짜장면.. 문뜩 그때가 그리워진다..

  4. 팽옥희 댓글:

    요즘은 주말 한 끼 배달음식으로도 흔한 짜장면이지만 예전엔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했던 귀한 음식이었어요.
    초등학교 졸업식날 전교 3등이었던 친구가 전학을 가게 되면서 자동으로 4등이었던 제가 학력상을 타게 되었어요. 엄마가 많이 기쁘셨던지 동네 친구 몇명과 아주머니들 과 함께 짜장면 한 그릇씩을 사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꽤나 알뜰하셨던 엄마가 사주신 짜장면 맛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그 때 맛은 않나는 것 같아요^^

  5. 금홍 댓글:

    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왔어요.
    집앞에 우물이 있고 복숭아 과수원이 끝없이(그땐 그렇게 느꼈어요) 펼쳐져 있어
    봄이면 분홍 복숭아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곳에서
    **단지라는 이름의 택지에 집들이 한창 들어서던 먼지 폴폴 나는 곳으로 이사를 했어요.
    주변 환경도 학교도 아이들도 많이 낯설었지요.

    아빠가 500원 동전 두 개를 주시면서
    동생과 둘이 자장면을 먹고 오라는 미션을 주셨어요.
    한 손에는 커다란 동전 두 개를 땀이 고이도록 꼭 쥐고
    다른 손은 동생 손을 잡고 우리끼리 학교옆 자장면집에 갔어요.
    당시 500원 동전 하나면 자장면 한그릇을 먹을 수 있었어요,

    자장면 집 앞까지 신나서 달려 갔는데
    미닫이 유리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어요.
    어른들이랑 같이 안가고 아이들만 와서 자장면을 팔지 않을까봐요.

    동생 손을 잡고 집으로 다시 올라가서 자장면 못먹고 왔다니까
    아빠가 “그냥 들어가서 자장면 두 개 주세요 하면 돼”라며 큰소리를 내셨죠.

    다시 동생 손을 잡고 자장면 집으로 가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나요.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그렇게 몇 번을 집과 자장면집을 오가다가
    용기를 내어 자장면집 미닫이를 밀었는데 제 눈에 들어온 건
    자장면 집 가득 하얀 태권도복을 입은 아이들과 관장님이었어요.

    왠지 모르게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 문을 얼른 닫고
    동생에게 ” 우리 복잡하니까 재네들 나가고 먹자.”고
    이유를 댔어요.

    태권도 아이들 때문에 자장면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겠고
    자장면 꼭 먹고 오라던 아빠 말씀 때문에 집으로도 못가겠고
    머리가 아팠어요.

    동생이랑 학교앞 문방구 근처를 서성이면서
    태권도 아이들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죠.
    그때 들어가 자장면을 시켜 먹었으면 벌써 다 먹고 나왔을 시간인데.

    아빠에게 우리끼리 자장면 먹고 왔다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동생과 아이디어를 냈어요.
    동전을 문방구앞 화단 나무밑에 숨겨두고
    아빠에겐 자장면 먹고 왔다고 말하기로 한거죠.

    화단 가운데 나무 아래를 살짝 파고 동전 두 개를 넣고
    흙을 덮고 묻은 자리를 표시하는 작은 돌을 올려 놓았죠.
    “집에 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돈 찾아서 자장면 먹자~”고
    동생에게 약속을 하고

    집으로 가 아빠에게 당당하게 말씀드렸죠.
    “자장면 맛있게 먹고 왔어요.”
    미션을 완수한 저는 칭찬을 들었고

    그 길로 동생과 나가논다며 다시 내려와
    화단 나무밑에 묻어둔 동전을 찾았는데
    아무리 파도 동전이 없었어요.
    2살 아래 동생 눈에서는 굵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그날 저랑 동생은 자장면을 먹지 못했어요.

  6. 김선태 댓글:

    저녁 잘먹고 짜장면 7그릇 먹어치운 후배

    1962년 9월 어느 저녁시간.
    당시 국립사범학교 3학년이던 나는 기숙사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었지만 아직도 훤히 밝았고,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학교 주위를 돌고 있었다. 학교 교문 앞에는 일본시대에 심어진 유동 나무가 100여 그루나 심어져 있는 녹지가 있었다. 기울어 가는 햇볕이 아직 따가워서 우리들은 유동나무 밭의 잔디밭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유동나무 밭 입구 부분에 짜장면집이 있었는데, 짜장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것이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와! 짜장면 한 그릇 먹어 봤으면 좋겠다.”
    1년 후배인 같은 동네 동생이 말문을 열었다.
    “금방 밥 먹고 나와서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에이, 그 까짓 밥 한 그릇 먹었어도 양이 안 차는 걸.”
    “그럼 또 짜장면이 들어 갈 것 같단 말이야?”
    “한 그릇이 뭐야. 일곱 그릇도 먹겠다!”
    사실 어려운 시절이어어서 자취하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주는 집이 별로 없었다. 일주일 식량을 가지고 와서 간신히 배고픔을 면할 정도로 먹어도 토요일이면 점심 먹을 것이 모자라곤 하였다. 그러니 늘 배고픈 것을 참고 살아야만 하였다. 아니 학교에 다니는 것만도 다른 형제들에게 미안하여서 배고프다는 소리 같은 것은 사치스런 소리라서 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러니 금방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또 배가 고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저녁밥을 먹고 돌아서 나오는 처지에 일곱 그릇이라니 너무 한다 싶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을 하였지만 대꾸를 안 하고 있는데 우김질 잘하는 치영이가 나섰다.
    “정말 일곱 그릇을 먹을 수 있단 말이지?”
    “그럼 그까짓 걸 못 먹어?”
    이 정도가 되면 분명 먹기 내기가 날 것 같아서 형인 내가 나섰다.
    “야! 너희들 그러다가 정말 먹기 내기를 하게 생겼다? 그건 정말 미련한 짓이야. 먹고 병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했더니 먹을 수 있다고 자신한 후배 남길이가
    “병이 나긴 왜 병이나? 못 먹어서 병이 났음 몰라도….”하면서 큰 소릴 친다.
    이정도면 말릴 수 없는 차지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좋아 그러면 만약 못 먹으면 네가 먹은 것 일곱 그릇 값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한 그릇씩 사주기로 한다. 자신 있어?”
    “그럼. 만약에 내가 못 먹으면 두 그릇씩도 사줄게.”
    “그래? 그럼 다들 들었지? 정말 내기를 하는 거야? 만약 남길이 네가 일곱 그릇을 다 먹으면 그 값은 내가 낼 거야 그렇지만 못 먹었을 때는 네가 먹은 일곱 그릇 값하고 우리 세 사람 두 그릇씩 사주는 것 합쳐서 열 세 그릇 값을 네가 내는 거야? 자신 있어?”
    “물론이지. 다들 들었는데 내가 거짓말을 할 사람이야?”
    “야, 그래도 너무 한다. 지금 막 밥을 먹고 나왔는데, 일곶ㅂ 그릇이 다 들어갈까?”
    곁에서 듣고만 있던 치영이의 사촌 형 하영이도 거든다. 안 될 거라고…
    “하여튼 내기를 한 거야. 나 지금 들어가서 짜장면 시킬 거야!”
    “좋아. 가자.”
    “다들 들었지? 그런 들어가자!”
    우리가 짜장면 집으로 들어가자 주방장이자 사장님이 반가이 맞아주신다.
    학교가 시내에서 4km나 떨어진 외딴 곳에 있어서 학교주변에는 문구점이 두 곳이 있을 뿐이었는데, 몇 달전에 이런 짜장면 집이 생겨서 우리들 기숙사 학생들은 가끔 들르곤 하였고, 손님이 별로 없는 짜장면 집의 사장님은 우리들과 친구처럼 대해 주셨다. 심지어는 반죽으로 짜장면을 뽑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실습도 시켜 주시곤 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심심하면 짜장면 한 그릇 사먹기 위해 나갔다가 자신이 뽑은 짜장면을 먹고 오기도 하였었다. 그렇게 친숙한 관계가 되어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슴없이 외상도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저녁 산책이랄까 할 일이 없어서 학교를 헤매다가 나온 우리들이 돈을 가지고 나왔을 리가 없었다.
    “아저씨, 남길이가 방금 저녁을 먹고 나와서 짜장면을 일곱 그릇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서 내기를 하러 왔는데 짜장면 일곱 그릇을 만들어 주세요. 그렇다고 쪼금씩만 담으면 안 돼요. 돈은 다음에 드릴 게요?”
    “그래 알겠다. 나는 짜장면 팔아먹어서 좋지만, 먹는 내기는 안 하는 거야> 위험해”
    “아니에요. 그까짓 짜장면 일곱 그릇을 먹고 병 날까 봐서요?”
    “그,래 그래도 조심해야지. 지금 나희들 배고프고 못먹고 살지만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병이 되는 거야. 안 돼!”
    “그럼 우리 시내로 갈까요? 이젠 여기 안 올 거예요?”
    “그럼 할 수 없지. 내 만들어 줄게. 그러나 내기에 이기려고 억지로 먹으면 위험해.”
    하시면서 짜장면을 뽑기 시작하였다. 우리 그 동안 뽑는 모습을 보고 흉내를 나어 가면서 그 방법을 익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드디어 짜장면 일곱 그릇이 나란히 나왔다.
    “큰 양푼 하나 주세요.” 남길이는 큰 양푼에다가 일곱 그릇을 한데 부어서 마구 뒤적인다. 그러니 이젠 아무리 큰 그릇이지만, 짜장면은 한 그릇이 되어 버렸다. 일곱 그릇을 차례로 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한데 합쳐 버리니 간단하게 한 그릇으로 놓고 먹기 시작을 하였다.
    정말 옆에서 본 우리들은 먹고 싶어서 침이 넘어가는 것을 참으면서 정말 다 먹을 수 있을까 지켜보고 있는데, ‘게 눈 감추듯’ 짜장면 가락들이 사라져 가는데 불과 10분도 안 결려서 짜장면 그릇은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후다닥 먹어치운 남길이 물을 한잔 마시고 나서 “한 그릇 더 먹을 수도 있겠다.“하면서 일어서는데 우린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인 남길이가 저녁을 먹고 30분도 안 지나서 짜장면 일곱 그릇을 먹어치우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ㅇ뤼는 이제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하면서 그 지독하게 먹은 남길이가 병이 나지 않게를 바랬는데, 정말 아무런 일도 없이 넘어갔다.
    그 뒤 남길이 이름이 바뀌었다. “야! 짜장면 일곱그릇!” 이렇게…..

  7. 김유리 댓글:

    저는 짜장면이 어릴적에 싫었습니다.
    그당시 유일한 배달음식이었나봅니다.
    부모님모두가 사업을 하시다보니 밤늦게 까지 일하시는 날에는
    저희 동에 초원의 집 (중국집)에서 항상 짜장면을 배달시켜서 저희 세 자매가 먹곤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친구들이 큰 행사때만 먹는다고 기다리는 그 짜장면이 싫었습니다.
    짜짱면 배달 오빠가 오는 날은 여지 없이 엄마 아빠가 늦게 오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자매의 막내라서인지 짜장면보다는 엄마, 아빠가 일찍 오시는게 더 좋았답니다.
    먹다 잠이 드는 것보다는 엄마품이 아빠 냄새가 더 좋았던 나이라서
    그런데 다라자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짜장면이 싫답니다.
    그렇게 커리우먼이셨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신 지금 제일 맛있게 드시는 음식이 짜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안계시는 그날이 오면 짜장면이 그리워 질수도 있을까요?

    (저만 우울한 기억이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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