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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 대담 | 일상의 예술, 글씨

한글을 표현하는 예술가들 서예가와 폰트 디자이너

글씨란, 단순히 문자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단어의 의미를 나타내고 기록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단어 특유의 미묘한 뉘앙스와 말하고자 하는 이의 주관적 세계가 담긴 일상의 예술이라 할 만하다.

서예와 폰트
똑같이 글씨의 뜻이 담긴 이 두 가지 단어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어딘가 예스럽고 단아한 이미지가 생각나는 서예는 아날로그적이며 풋풋한 인간미가 느껴지며, 폰트는 왠지 세련되고 재미있으며, 디지털스럽고 감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글’이란 재료를 통해 상반된 두 가지 느낌을 표현하는 두 사람. 이정화 서예가와 심우진 폰트 디자이너가 말하는 글씨의 의미를 들어보자.

각자 직업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서예가 서예가로서 작품 활동 및 서예를 알리는 강연, 드라마나 영화의 대필을 맡고 있습니다. 포스터나 전시장의 문구, 각종 이벤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최근 tvN <유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하며 서예가 좀더 대중화되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탓에 강연과 전시가 많이 줄긴 했지만 온라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서예를 알려나가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폰트 디자이너 폰트 디자이너로서 제 직업의 만족도는 ‘300%’라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만든 폰트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잡지,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폰트 중에는 개발이 중단되거나 쓰이지 못한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용자들로부터 ‘폰트가 예쁘다’는 짧은 칭찬 한마디에 모든 고단함이 사라지고 즐거움이 솟아나곤 해요. 폰트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서예와 폰트를 제작함에 있어 본인의 스타일이 있다면?
서예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는다는 것이 분야에 따라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서예는 하나의 스타일을 갖는다는 것이 결국 틀에 갇혀 변화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글에 담긴 마음과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에 있어 카멜레온처럼 서체 또한 잘 변화할 수 있어야 더 좋은 서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글자를 색다르게 보여주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글자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해서 그것이 좋은 반응을 일으키거나 반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글자의 분위기를 드러내면서 새로운 시선을 주는 것도 매력적이라 생각합니다.

폰트 디자이너 저에게 폰트란 쓰면 쓸수록 느낌을 알아가는, 마치 양파 같은 것이라 생각해요. 폰트는 그 모양만으로 단어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글자의 조합으로도 느낌이 달라지며 전체 문장 속에서도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사용자들로 하여금 폰트를 접할 때 좋은 첫인상을 줄 수 있도록 여러 요소를 꼼꼼히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대표작품은 무엇인가요?
서예가 2011년 방영했던 <뿌리 깊은 나무> 촬영장에는 정말 많이 갔어요. 주인공이 말을 못하는 상황이라 대사가 있으면 필담으로 해야 하기에 대학생 때 학교와 촬영장을 계속 오갔던 기억이 있어요. 촬영장에서 스텝 분들이 친절하게 챙겨주셔서 여러 작품들을 이어갈 수 있었고, 스텝 분들과의 인연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어요. 추운 날 야외촬영을 할 때면 조명팀, 음향팀, 제작팀 등 각 팀에서 핫팩을 챙겨주셔서 주머니가 굉장히 뜨거웠던 기억이 있는데, 그 따뜻함이 가장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들은 <미스터 선샤인>을 가장 많이 기억해주시는 것 같아요. ‘보고십엇소’라는 글씨에서 강하고 당찬 여주인공 ‘애신’의 겉모습과는 달리 수줍은 마음이 드러나도록 부드러운 필체로 표현했는데, 사람들도 그 부분을 공감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폰트 디자이너 산돌정체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서체 중에서도 긴 글에 쓰는 본문용 폰트는 제작 난이도가 높아 문화의 꽃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특히 한글 폰트는 본문용이 적습니다. 1984년에 설립하여 37년간 폰트를 만들고 있는 산돌은 2017년부터 ‘산돌정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제작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고객들의 관심과 성원으로 제작 5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산돌은 지금까지 12종을 발표했지만, 워낙 큰 프로젝트라서 전체 기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어 갈 테니 기대해주세요.

한글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철학은?
서예가 서예와 폰트 모두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지만 차이를 생각해보자면, 폰트는 가독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그러나 서예는 같은 글자도 그 순간의 느낌과 마음이 표현되기에 똑같은 글자가 없습니다. ‘인중체’를 만들어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결국 고사하게 된 이유도 글자를 예술로 표현하려고 하는 마음이 더 강했기 때문이죠. 상황에 따라 같은 글자도 달리 표현하고 싶을 때가 많은데 고정적인 틀로 글자를 만들어두면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폰트 디자이너 우리는 매우 창의적이고 체계적인 ‘한글’이라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한글 폰트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한글 서예의 역사도 비교적 짧지요. 서양에서는 도서관에서 고서 한 권을 고르면 폰트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오랜 손글씨 문화가 있기 때문이죠. 처음 그래픽디자인을 했을 때는 한글 폰트가 그리 많지 않아 항상 쓰는 폰트만 썼죠. 아쉬움이 정말 컸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새로운 폰트를 즐겁게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할까요.

서예가와 폰트 디자이너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서예가 서예를 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듯 글씨는 그 사람과 같습니다. 글을 쓰며 그 의미를 잘 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문방사우라고 불리는 붓, 먹, 종이, 벼루를 갖추어야 합니다. 서예는 모두 자연에서 온 재료를 사용합니다. 붓은 동물의 털로 만들며, 먹은 동물의 뼈를 섞어 만듭니다. 벼루는 돌이며, 종이는 나무죠. 서예야말로 자연친화적 작품이에요. 먹이 품은 향기와 먹이 마르고 난 뒤 종이에 비치는 먹의 색은 정말 아름다워요.

폰트 디자이너 폰트는 미학과 공학이 얽힌 복잡한 개발과정을 거칩니다. 같은 폰트라 할지라도 수많은 워드프로세서와 웹, 모바일, 각종 인쇄매체 등에서 동일한 모양으로 재연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매체에 대한 공학적 지식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또한 문자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손글씨와 인쇄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미학적 맥락을 익혀야 합니다.

한글을 다루는 고수로서 직업적 고민이 있다면?
서예가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는 것 같아요. 지금처럼 글씨를 좋아하고 잘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 지금 받는 주목과 관심에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더욱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7살에 아버지가 서예학원을 운영하시며 자연스럽게 서예를 접했지만, 저에겐 서예가 ‘놀이’였지 서예를 ‘직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중국어 통역사라는 꿈도 가지고 있었지만, 고3 때 진로 결정을 위해 중국어 통역사와 서예가 사이에서 고민을 했습니다. 종이에 두 직업을 적어두고 장점을 적어보는데, 서예가가 장점이 훨씬 많이 적히더라구요.

폰트 디자이너 제가 만든 폰트가 수백 년 간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름의 윤리의식을 갖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편향적으로 생각해서도 안돼요. 폰트 중에는 아주 오랫동안 이용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몇 번 사용되고 금방 잊히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개성이 강한 배우가 모든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지만 몇 번의 연기만으로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타이포그라피나 디자인 업계에서는 ‘나쁜 조판이 있을 뿐, 나쁜 폰트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객들이 만족할 수 있는 좋은 폰트를 개발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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