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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민속

조선시대에도 출산장려정책이 있었을까?

 

우리나라 출산율이 사상 최저인 1.04명까지 떨어져 인구 학자들은 올해 안에 연간 출생아 수의 심리적 저지선으로 여겨지는 30만 명대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출산율은 여성 1명이 가임可姙 기간에 낳는 자녀수로 현재의 인구를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2.1명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처럼 인구절벽이 가속화되면, 우리나라 인구가 반 토막 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에 정부는 저출산 해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각 지자체도 앞 다투어 출산장려책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농업사회로 인구가 곧 국가생산성이자 국력이던 조선시대에는 어떤 출산정책이 있었을까.

 

세종실록에 기록된 만 30일의 남자 출산휴가

 

놀랍게도 조선시대에는 현대국가들도 최근에 도입하기 시작한 남자의 출산휴가가 있었다. 세종실록 1434년 4월 26일이하 음력 세 번째 기사가 임금이 남자의 출산휴가를 형조에 지시한 내용이다.

“경외京外의 여종이 임신을 하거나 산후産後 100일 안에 있는 경우는 전부터 휴가를 주어 왔으나 … 중략 … 이제부터는 사역인使役人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만 30일을 쉬게 하라”

또한 임금이 입법취지를 직접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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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임산부가 출산 중에 도움을 받지 못해 사망한 일이 있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출산과 산후조리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여성의 출산휴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부부가 돕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니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실록 원문에 나오는 경외노자京外婢子, 경향의 여자노비와 역인지처役人之妻, 노역인의 아내의 표현으로 보아 극히 일부 하층민에게만 적용된 것으로 일반적인 출산정책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도움이 꼭 필요한 계층을 대상으로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중심인 요즘의 그것보다 훨씬 앞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다둥이 출산하면 쌀과 콩 10석 하사

 

요즘도 다둥이 육아가 어려운데, 모든 것이 부족했던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쌍둥이까지는 별다른 지원이 없었지만, 셋 이상이면 요즘 기준으로도 만만치 않은 양육비가 지원되었다. 왕실의 재정 상태나 임금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셋 이상의 다둥이를 낳으면, 아들 딸 구분 없이 쌀과 콩 10석을 임금이 하사했다. 쌀 10석약 1,400㎏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10여 만 원으로20kg 30,000원 기준 현재 각 지자체가 셋째 이상 자녀 출산 시 지급하는 금액과 견주어도 적지 않은 금액이다.

실록에는 개국초기부터 다둥이 기록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양육비를 처음 지급한 것은 세종 2년인 1420년 12월 20일이다. 이날 두 번째 기사는 경상도 언양 이신기의 처가 세 아들을 낳아 쌀을 하사했다는 내용이고, 1236년 6월 2일은 쌀과 콩 10석을, 1447년 4월 9일 첫 번째 기사는 쌀과 콩 7석을 하사했다고 나온다. 이로 보아 이때까지는 지원 금액이 정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1431년 7월 5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과 승지들이 세 쌍둥이 지원을 놓고 끝장토론을 벌인 내용이다. 경상도 초계군에 사는 사노비 약비가 아들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두 아이가 죽고 한 아이만 생존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승정원은 셋이면 당연히 쌀 10석을 주겠지만, 하나만 낳은 것이니 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임금은 살아남은 아이는 한 명이지만, 낳은 건 셋이니 쌀 10석을 주어야 한다고 맞받았다. 결국 이 문제는 예조에 넘겨졌고, 또 다시 격론 끝에 쌀 5석을 하사하는 것이 적정한 것으로 유권해석 되었다. 이해를 아주 못할 것은 아니지만, 아이 잃은 산모를 위로는 못할지언정 당대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의 마음씀씀이 치고는 너무 야박했다는 생각이 든다.

백동자도 8폭 병풍, 아들의 출산과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_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실록에는 네 쌍둥이 기록도 여럿 있는데, 출산지원금은 세 쌍둥이에 준해서 지급되었다. 명종실록 1546년 2월 8일인데, 원주에 사는 사월이는 아들 셋을, 양산에 사는 명월이는 아들 넷 쌍둥이를 낳았다는 보고이다. 이번에도 승정원이 딴지를 걸었다. “근래 들어 흉년이 계속되어 비축곡물이 거의 떨어졌으니 감량 지급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 정도로 국고에 문제가 되겠느냐.”며 전례대로 10석을 하사하라 명했다.

 

형편 어려운 다둥이 가정에 물품 하사

 

출산뿐만 아니라, 양육 중에도 다둥이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있으면, 물품을 하사했다. 인조실록 1641년 6월 10일이다. 경기도 풍덕에 사는 임광의 처가 젖 하나로 세 쌍둥이를 키운다고 보고하자 임금은 즉석에서 “얼마나 힘들겠느냐. 필요한 물품을 조사하여 서둘러 하사하라.”라고 명했다. 여염집 육아문제를 임금과 신하가 진지하게 논의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감동적이다.

이후로도 다둥이 기록이 무수히 많지만, 부모의 이름이나 보상여부에 대해 기록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여 더 이상 출산정책이 필요하지 않았거나, 재정난으로 더 이상 양육비를 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실제로 조선의 인구는 1,764,504가구, 7,561,403명으로 정점을 이룬 순조 7년인 1807년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이로 보아 조선의 출산정책이 흐지부지된 것은 전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출산장려는 더 많은 세금과 생산을 위한 것이었지만, 작금의 그것은 멀지 않아 인구가 반토막날 수도 있는 국가적 재난에 가깝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결혼을 미루면, 당연히 출산율은 낮아진다. 가장 확실한 출산정책은 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주는 일이다. 청년들이 마음껏 사랑하고 아이를 낳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글_ 최중기│국가기록원 홍보팀장
중앙대,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충북대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했다. 신문기자를 거쳐 공무원으로 전직, 현재는 국가기록원 홍보팀장을 맡아 정책수요자 중심의 홍보를 실천하고 있다. 각종 강의를 통해 정책홍보가 이젠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닌, 국민주권과 알권리를 위한 기본의무임을 강조해 왔다. 저서로는 칼럼집 ‘날으리 하늘이 제 있음에’, 자서전쓰기 안내서 ‘사과나무일기’가 있으며, 2013년 ‘사과나무일기’ 발간 이후에는 경상북도공무원교육원 법무연수원 등에서 실용 글쓰기를 강의했다. 지난 2월부터 서울신문 ‘역사 속 공무원’을 연재하면서 칼럼리스트로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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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이지영 댓글:

    재미있는 내용 쉽게 잘 읽히네요. 과거와 현재의 비교도 흥미롭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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