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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박물관

장독대

“박물관 근처에 된장을 기본으로 하는 음식점이 있다. 그런 식당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필자는 그곳에 가면 입이 즐거운 것은 당연하고 눈 또한 즐겁다. 비록 오래된 장독도, 예전 장독대의 형식도 아닐지라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줄지어 늘어선 장독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찾은 식당을 들어서는데 평소보다 된장 냄새가 더 심하게 났지만 그러려니 하고 입구 쪽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설 때야 그 냄새의 진원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안쪽 천정에 곰팡이꽃이 핀 메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정말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웠다. 이게 이렇게까지 반가울 일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메주’ 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제주도의 전통 가옥구조는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 ‘밖거리바깥채’, ‘목거리곁채, 헛간채’로 구분하는 집이 들어서 있고, 안거리 내부는 ‘큰구들안방’과 ‘고팡곳간’이, ‘작은구들작은방’과 ‘작은상방작은 마루’이 ‘큰상방마루’을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있다. 필자도 어렸을 때 전형적인 이런 구조의 집에서 자랐다.

해마다 11월이면 큰 가마솥에서 메주콩을 삶고 으깨어서 메줏덩이를 만들어 말린 후에 메주 띄우기를 위해 구들, 상방마루 할 것 없이 걸어둘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메주를 매달아 두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비명이 나서 잠을 자던 가족은 놀라 깨었고 소리가 난 안거리의 작은구들작은방로 모였다. 막냇동생이 소리를 질렀던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달려가 보니, 막냇동생의 배 위로 매달려 있어야 할 메주가 떨어져 있었다. 하필이면 못이 박힌 구멍이 헐거워서 견디지 못하고 메주와 함께 떨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겨울이라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어서 충격이 덜했다는 것이었다. 잠결에 눈 비비며 보면서 아파하는 동생이 괜찮은지 걱정은 되면서도 그 상황이 우스워 웃음을 터트렸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아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동생 방이었던 ‘작은구들작은방’에는 메주를 매달지 않게 되었다. 물론 걸어두는 장소를 바꾸기도 했고 만드는 메주의 양이 점점 작아졌으니 걸어둘 데가 여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아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림_유영(어반스케치 회원)

잘 띄운 메주는 1월에서 2월 중 ‘손 없는 날’, ‘말날午日’에 장을 담갔다. 장의 종류나 지역에 따라 시기는 다르지만 보통 입동立冬 무렵에 메주를 쑤고 정월에서 3월 무렵에 장을 담근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는 11월에 메주 쑤고 3월에 장을 담근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담그기 전에 미리 해놔야 할 일이 많은데 그중에서 장을 담글 때 사용할 항아리를 미리 소독하여 말리고, 장독대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은 장담그기 전 준비 과정의 기본이었다.

장독을 올려놓는 낮은 축대築臺를 ‘장독대’라 한다. 장독대는 보통 양지바르고 배수가 잘 되는 약간 높은 곳, 혹은 지면에서 20∼30cm 정도 높이로 호박돌과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여러 개의 판석을 깔아 만든다. 집안 살림의 규모에 따라 장독대의 규모도 비례한다. 대부분 부엌에 가까운 뒤꼍 공간에 두지만, 종가宗家 등 살림살이 규모가 있는 집에서는 대청의 주축 선과 연결되는 정결한 앞자리에 배치하기도 하고, ㄱ자집에서는 안채의 옆 공간인 뒤뜰에 장독대를 만들어 놓기도 한다. 크기, 상태가 여하튼지 장독을 바닥에 두지 않고 지면보다 높게 축대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함부로 대하지 않고 그만큼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독대에는 성주, 터주, 칠성이 모셔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연중행사로 음력 시월 상달에 고사를 지내고, 평상시에도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재앙을 떨치고 평안과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했다. 칠성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의미한다.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이 향한 방향을 통해서 방위뿐 아니라 각 계절을 알 수 있고 어두운 밤하늘에서 가장 쉽게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별자리이다. 이런 이유로 북두칠성은 예로부터 동양에서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피는 별자리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북두칠성에 있는 삼신할머니에게 명줄을 받아 태어나고, 삶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모두 북두칠성이 주관한다고 믿었으며 어부들은 스스로를 “칠성판을 이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리네 어머니가 장독대에서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리는 칠성님도 바로 북두칠성이다.

그림_박서영(어반스케치 회원)

장독대를 부르는 말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제주도에서는 ‘장항굽’, 북쪽에서는 ‘장독걸이’라고 부르며, 장독대에 놓여 쓰이는 장독 또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부른다. 생산자와 유통자, 소비자 간의 소통과 공감을 통해 얻은 약속이 언어화되어 녹아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장항굽장독대’도 주로 ‘정지부엌’ 가까운 뒤꼍 공간에 두었다. 어려서 살았던 집도 ‘작은상방작은 마루’으로 나가면 ‘정지부엌’가 있고 정지 입구엔 ‘물팡돌허벅을 올려놓는 판석 모양의 넓은 돌’, 그리고 그 옆으로 장항굽이 ‘우영텃밭’에 만들어져 있었다. 장항굽에는 드나드는 문을 달아서 쉬운 출입을 막았었다. 장담그기 후 할머니와 어머니는 장독 뚜껑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고 수시로 항아리를 닦아 장이 잘 숙성되어 깊은 맛이 나기를 바라며 낮 동안에 장항굽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집안에 대소사가 있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는 밤과 새벽에 장항굽 출입을 하셨다. 쉬운 출입을 막는 그런 곳일수록 아이들의 놀이공간이 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래서 어린 우리는 ‘곱을락숨바꼭질’을 하기 위해 장항굽에 드나들었다. 아주 은밀하게 할머니, 어머니 몰래. 또한 술래 몰래.

그림_김영림(어반스케치 회원)

생각해 보면 장담그기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장담그기 전 준비 과정이 꽤 길었었다. 이 시간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경험과 부지런함, 수고로움이 꼭 필요했으며 어린 우리들의 작은 도움도 간헐적으로 보태야 했다. 그때는 날을 택하여 장을 담그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렇게 거치는 까다로운 준비 과정도 싫었다. 또한 물어보는 말에 많은 이유 있는 답을 해주시는 어른들의 복잡한 변명이 그때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여러 해 흐른 지금은 맞다. 어른들의 말에는 그 언어 공동체가 경험한 데서 얻은 지식, 신념, 세계관 등이 녹아들어 있다.

이제 곧 장담그기 시절이다. 메주콩을 삶을 때의 구수함과 메주 띄울 때 나는 특유의 냄새, 그리고 ‘장항굽장독대’에서 익어갔던 우리네 시간이 그리워진다.


글 | 이경효_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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