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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공공재로서의 문화재, 『하피첩』

지난 8월 국립민속박물관은 파주 개관 2주년을 맞아 <하피첩: 아버지 정약용의 마음을 담은 글> 특별전을 개최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보물 1683-2호로 지정된 『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跡 霞帔帖』이하 『하피첩』을 2015년 9월 구입했다. 문화재로 지정된 자료를 구입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피첩』은 정약용1762-1836의 강진 유배 시절인 1810년 부인 홍 씨가 보내온 치마를 잘라서 만든 것으로서 두 아들학연(1783-1859), 학유(1786-1855)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은 서첩이다. 부인의 치마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서첩의 제목은 하피첩霞帔帖, 즉 ‘노을빛 치마로 만든 서첩’이라 이름 지었다.

『하피첩』의 여정
본래 정약용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던 『하피첩』은 한국전쟁 시 분실하여 그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6년 현재도 방송되고 있는 한 방송사의 유물 감정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하피첩』 감정 의뢰자는 ‘몇 년 전 고물상 할머니의 수레에 실려 있던 것을 우연히 얻었다’라고 설명했으며, 감정가 일억 원에 매우 놀란 모습을 보였다. 『하피첩』은 이후 전 부산저축은행 대표가 소유하게 되었고, 문화재청에서 시행한 ‘옛 글씨 일괄공모를 통한 조사지정 사업’의 일환으로 보물 1683-2호로 지정되었다. 예금보험공사는 2011년 파산한 부산저축은행 전 대표로부터 압류한 자료를 2015년 9월 한 경매사에 출품하였다. 당시 경매에서는 출품작의 가치와 특성 등을 고려하여 개인의 경매 응찰을 막고 공공기관만 경매에 응찰할 수 있도록 했다. 여러 기관과의 경합 끝에 폐품으로 사라질 뻔한 『하피첩』은 국립민속박물관의 소장품이 될 수 있었다.

보존 처리 중 발견된 서첩의 순서

새로운 발견
박물관에서는 『하피첩』을 구입한 후 지류 보존처리실에서 보존 처리를 시행했다. 구입 전 『하피첩』은 각 첩의 표지에 제목이 일부 남아 있었으나 첩의 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보존 처리 과정 중 두 첩에서 각각 ‘을’과 ‘정’이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1813년 정약용이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에 적힌 ‘서첩을 네 첩 만들었다’는 기록과 연결해 『하피첩』이 갑을병정甲乙丙丁의 순서로 제작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다른 한 첩은 유물의 보존을 위해 해체 작업은 하지 않았으나, 1810년 7월로 세 첩 중 시기가 가장 빠르고 다른 두 첩은 종이가 일부 섞여서 만들어진 것에 비해 본문 전체가 비단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순서상 갑일 확률이 높았다. 세 첩이 모두 붉은색 면지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표지와 필사지가 같은 재질인 것으로 보아 서첩을 만든 시기와 내용을 적은 시기가 같음을 알 수 있었다.

을첩의 사언시
정첩의 어린 손자에게 부탁한다[付穉孫]

『하피첩』에는 아버지 정약용이 폐족의 자손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몸가짐은 어떻게 가져야 하고, 친척과 어떻게 지내야 하며,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아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대부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시문집 제18권 「가계家誡」에 실려 있으나 을첩의 경구[敬直義方]와 사언시쓰러진 나무에 싹이 나고, 정첩의 ‘어린 손자에게 부탁한다[付穉孫]’라는 글귀는 『하피첩』에만 실려 있다. 서예사적인 측면에서도 『하피첩』은 정약용의 서체 연구 자료가 될 수 있다. 정약용이 직접 쓴 것으로 밝혀진 것은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과 간찰이 몇 개 있을 뿐이다. 같은 내용의 서사를 한 편은 전서로 한 편은 해서로 기록하고 있어 다산의 전서와 해서를 모두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하피첩』은 제작 이후 한 번도 개장改將되지 않은 상태여서 19세기 초 장황 양식과 당시 사용된 종이 등을 짐작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궁금한 것들
▶ 사라진 병첩은 무슨 내용일까?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총 9편의 「가계家誡」가 실려 있다. 그 중 『하피첩』은 1810년 7월, 9월에 쓴 내용과 대부분 일치한다. 『하피첩』 중 두 첩은 9월에, 한 첩은 7월 동암에서 쓴 것으로 저술된 시기와 장소를 고려할 때 사라진 병첩은 1810년 처서에 동암에서 기록된 <학연에게 주는 가계示學淵家戒>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견해로는 1808년 윤오월에 기록된 <두 아들에게 주는 가계示二子家戒>라는 의견도 있다.

▶ 부인 홍 씨의 치마 크기는?
갑첩은 표지와 면지를 제외하고 전부 평직의 비단을 사용했으며 을첩과 정첩은 비단과 종이각 6면를 섞어서 사용했다. 부인 홍 씨의 치마 크기를 『하피첩』 서문에는 다섯 폭으로, <매화병제도>에는 여섯 폭으로 적고 있다. 『하피첩』 본문에 사용된 비단은 총 80면으로, 한 면의 크기는 세로 20cm, 가로 12cm이다. 서첩 세 권을 만들려면 적어도 세로 100cm, 가로 192cm 크기의 비단이 필요하다. 발견되지 않은 서첩 한 권과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의 크기세로 44.7cm, 가로 18.4cm를 고려하면 부인 홍 씨가 보낸 치마의 크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하피첩 특별전(2016)

병첩丙帖을 기다리며
국립민속박물관은 『하피첩』 구입 당시 진행된 언론 공개회에서 ‘『하피첩』을 우리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 약속은 국역서 발간2016, 특별전2016, 2023, 외부 기관의 대여 전시실학박물관 등 5개소등을 통해 실천하고 있다.국립민속박물관은 『하피첩』을 서지학자, 국역자, 보존과학자, 민속학자, 역사학자 등의 전문가 집단을 통해 다양한 견해에서 연구하였다. 이러한 공동 연구는 문화재의 소유자가 공공기관이라는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수장고에 『하피첩』은 사라진 병첩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네 개의 첩을 모두 넣을 수 있는 보관함에 보관되어 있다. 병첩을 기다리며 공공유산으로서의 『하피첩』은 앞으로도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연구하고, 연구성과를 축적하여 많은 사람과 다양한 경로로 연구성과를 공유하는 살아있는 문화재로서 자리할 것이다.


글 | 권선영_섭외교육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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