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을 아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이 “카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라고 대답한다. 카레이스키는 1990년 한국-소련 수교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수난사를 다룬 MBC 드라마 <카레이스키>1994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고려인을 ‘카레이스키’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카레이스키’는 잘못된 단어이다. 굳이 말하자면 잘못된 단어라기보다는 의미는 통하지만 정확한 단어는 아니다. ‘카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는 러시아어로 ‘한국의’, ‘한국인의’, ‘한민족의’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정확한 단어로는 한국 남자는 ‘까레이츠Коре́ец’, 한국 여자는 ‘까리얀커Корея́нка’이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을 ‘까레이츠Коре́ец’로 명칭을 통일해 부르고 있다. 한인들이 노령러시아령 연해주에 처음 나타난 것은 1863년으로, 함경도 북부지역에 살던 13개 농가 60여 명이 기근과 관리의 학정을 피해 연해주 지신허地新墟·Tizinkhe 강변에 들어가 집을 짓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한인들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 일대에 자리를 잡았으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에는 18만 명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소련과 일본의 극동지역 국경 긴장 문제 완화, 한인들의 일본 스파이 활동 우려, 중앙아시아의 농업 활성화, 농업 집단화 정책, 소수민족 정책의 일환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다양한 원인으로 한인들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다. 그 인원만 해도 17만 2천여 명에 이르렀다. 한인들은 그렇게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메니스탄 등의 황무지 같은 땅에 자리 잡고 터전을 마련하였다. 사막과 메마른 초원을 개척하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비옥한 땅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그 명분을 이어 살아오고 있다. 사실 고려인이라는 명칭도 30년 전부터 사용한 명칭이다. 이전에는 ‘소련한인’, ‘고려사람’, ‘재소한인’, ‘재러한인’ 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려왔다. 하지만,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조선인대표자 회의에서 소련 조선인의 명칭을 공식적으로 통일하고 그때부터 ‘고려인’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2021년부터 현재까지 <재외한인동포 생활문화조사중앙아시아>를 실시하고 있다. 원래 계획은 중앙아시아 현지를 방문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생활문화 변동 및 변화 양상, 한민족 공동체에 대한 이해 등을 조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으로 해외 조사가 난항을 겪게 되자, 조사지역을 국외에서 국내로 변경해 국내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생활문화를 조사·기록하고 있다.2022년 11월 보고서 출간 예정
현재 국내 거주 고려인은 약 8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대부분 고려인 3~4세대이다. 그들은 재외동포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이 한국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 중앙아시아의 계속된 경제적 침체와 자민족 중심 정책,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 문제로 한국 이주를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민족의 나라’ 즉, 고국을 찾는다는 것이다. 조사기간 동안 만난 고려인들 중 일부는 어른들로부터 “조상의 나라, 고국한국에 꼭 가봐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 고국에 한번 가 보는 게 소원’이라는 고려인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고국이라는 생각으로 한국에 왔지만, 차가운 현실의 벽을 실감하고 후회한다. 처음 한국 이주를 선택할 때, “한국만 가면 지금보다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고국에 가면 우리를 반겨 줄 거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실제 한국에서의 삶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5평 남짓한 원룸에서 생활하고 한국어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사회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로 인해 대부분 공장에서 단순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며, 육체적·정신적 힘듦을 경험하고 있다. 임금체불, 욕설과 폭언, 차별 등 같은 민족이지만, 살아온 문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중앙아시아로 돌아간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조상들도 강제이주를 통해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땅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민족을 지켜왔듯이, 그들도 고국에서 같은 한민족 공동체 구성원으로 생활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다.
고려인들은 민족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돌잔치, 결혼식, 환갑 등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한식寒食이다. 한식은 동지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로, 양력 4월 5일 무렵이다. 고려시대부터 한식은 설, 단오, 추석과 함께 한국의 4대 명절 중 하나였다. 현재도 한식은 산소에 손을 대도 탈이 없는 날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산소에 잔디를 새로 입히거나, 비석을 세우고 이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식은 그 의미가 축소되었고, 추석과 설이 대표 명절로 자리 잡았다. 한식은 식목일 날짜와 거의 비슷해서 식목일에 한식을 지내곤 하였는데, 2006년 식목일이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그 의미는 더욱더 퇴색되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설, 단오, 추석 등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식만은 꼭 지키려고 한다. 1년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최대 명절이다. 고려인들은 한식날을 잊지 않기 위해 양력 4월 5일을 한식이라고 정해 두었다. 소련 시절부터 사회주의 운동 및 각 소수민족 탄압에 따라 민족들의 고유 명절들을 구시대적 미신으로 여기고 이를 없애려고 하였고,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한식은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식은 러시아의 전통 명절 ‘조상들의 날’과 여러모로 비슷해서 이러한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 있거나, 타국에 있어도 한식날을 맞춰 조상 묘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아주 먼 타국에 있거나, 집안에 초상이 났다는 등의 피치 못할 상황 외에는 반드시 묘지를 방문한다. 만약, 직접 묘를 가지 못한 경우는 집 안에 음식을 차려놓고 인사를 드린다. 고려인들은 한식날 출근도 하지 않고, 학교에도 가지 않는다. 한식을 고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절이라는 것을 다민족들도 이해하고 있어, 학교, 회사 등에서 휴가를 인정해준다. 그리고 한식이 가까워지면 이날 제수祭羞로 사용하는 닭, 과일 등의 가격이 평소보다 상승한다. 그만큼 고려인들에 의한 수요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공동묘지 근처 길가에 묘지 장식용 꽃 장사와 옷, 음식 등을 판매하는 상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차량 또한 증가해 교통도 혼잡해진다. 한국에 있는 고려인들도 반드시 한식에 제사를 지낸다. 대부분 고려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한식 제사는 챙긴다. 현지처럼 직접 묘지를 찾아가지 못하지만, 고려인들끼리 모여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던가 아니면 당일 날 가족들끼리 모여 그들의 방식대로 제사를 지낸다. 이는 조상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이 시기에 맞춰 일부러 한식을 지내려 다녀오는 고려인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한식은 고려인들에게 중요한 명절이다.
제사상에는 쌀밥, 물, 닭고기, 생선, 지름구비기름에 구운 찰떡, 증편, 염지채부추나물, 과일, 초콜릿, 보드카, 그리고 살아생전 즐겨 드시던 음식을 준비한다. 제사를 지내는 방식은 간단하다. 조부·조모에게 먼저 인사를 드린다. 첫 줄에 올린 흰밥을 세 번 떠서 물에 말고, 음식 두 군데에 포크를 올린다. 그리고 보드카 한잔에다 세 번 술을 따르고, 절을 세 번 하는 것으로 마친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셨으면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진행한다. 그리고 잠시 조상들이 흠향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 제사를 마친다. 제사를 마무리하면, 제사상에 올린 음식 등을 비닐에 조금씩 담아 밖에 내어 둔다. 그러면 한식제사가 끝이 난다. 절차와 음식이 다소 다르지만, 우리의 제사와 매우 유사하다. 이처럼 고려인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 땅과 혹독한 환경 속에서 우리 민족의 특유성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들은 1937년 이후 다시금 조국으로 새로운 이주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외국인, 외국인 노동자, 이방인 등 낯선 시선으로 본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우리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피가 흐르는 한민족이다. 이제 우리는 고려인을 외국인, 이방인이 아닌 미래를 함께하는 소중한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
글 | 김형준_민속연구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