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로 지친 심신을 달래는 여름 풍속
계절상으로 무더위가 최고조에 이르는 양력 8월이면 계곡과 바다를 찾아 바캉스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제한이 따르긴 하나 이 무렵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를 실천에 옮기고 싶어 한다. 이러한 사정은 전통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이 찾아오면 야외로 나가 더위를 피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계곡과 폭포를 찾아 행하는 물맞이와 천렵川獵 등의 풍속이 여기에 해당된다. 요즘은 비록 다양한 형태의 바캉스 풍속이 생겨나긴 했지만 전통사회의 이들 풍속은 생업활동과 무더위로 지친 심신心身을 달래기 위한 전통사회의 최고의 피서避暑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통사회의 8월을 무더위와 관련된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성격을 지닌 세시풍속들이 적지 않은데, 실제로 절기상으로 김매기가 마무리되고, 곧 다가올 추석과 추수를 준비해야 하는 때가 바로 8월이다.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지역에서는 월동준비를 위한 다양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행해지는 것도 이 무렵의 풍경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대표적인 8월의 풍속 가운데 하나가 길쌈이다. 얼핏 무더운 여름과 베를 짜는 길쌈이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전통사회에서는 추석을 한 달 앞둔 음력 7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길쌈이 행해졌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여러 문헌자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우리의 대표적인 역사 자료인『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길쌈과 길쌈놀이의 실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왕은 이미 6부部를 정한 후에 이를 두 패로 가르고 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붕당을 만들어 가지고, 7월 16일旣望부터 날마다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績麻을 하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을 다소 살펴서 진 편에서는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놀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 때 진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서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會蘇 회소會蘇”하였는데 그 소리가 구슬프면서 아담하였으므로 뒷사람들이 그 소리를 인연으로 하여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 하였다.1) 왕이 여성들을 두 팀으로 나누고 한 달 동안 길쌈을 하게 하여, 그 양을 따져 승부를 겨루게 한 다음 음식을 장만하여 한 바탕 놀게 했다는 것이 이 기록의 주요 골자이다. ‘가배嘉俳’ 즉, 추석의 유래로도 널리 알려진 내용인데, 이 자료를 통해 길쌈과 추석의 연관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가 있다.
오랜 역사만큼 생업활동으로도 중요했던 길쌈
비교적 오랜 역사성을 지닌 길쌈은 삼·누에·목화 등의 소재를 사용하여 삼베·명주베·모시베·무명베 등의 피륙을 짜내기까지의 과정을 일컫는 용어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길쌈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그 역사만큼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단군조선과 기자조선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나 길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유물은 서기전 6천∼5천 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강원도 오산리의 신석기유적에서 발굴되었다. 평안남도의 궁산패총에서는 골침骨針에 감겨 있는 마사麻絲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문헌 기록에 의하면 예·마한·변한·진한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길쌈이 행해졌다고 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길쌈이 널리 성행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의 생업활동으로 길쌈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여러 자료 가운데 정학유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2)와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3)에는 조선시대의 길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전자의 책 6월조에는 “삼대를 비어 묶어 / 익게 쪄 벗기리라 / 고은 삼 길쌈하고 / 굵은 삼 바드리소”라 실려 있다. 반면, 후자인 『농가십이월속시』에는 아래의 내용이 소개돼 있다.
곡식 심고 나면 대부분 목화를 심나니
길쌈의 근본이 여기에 있다네(중략)
누에가 점차 자라 한 잠 자고 두 잠 자니
즐비하게 빛나는 것은 무수한 옥과 같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먹인 뒤에
고치가 강정같이 크기를 바라네
길쌈하고 뽕잎 따는 저 아낙 힘쓰 게나
– 『농가십이월속시』, 4월조
적어도 화학적으로 만들어낸 합성섬유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국 어디서나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길쌈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누에를 친다.’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 농사는 남편의 몫이지만 길쌈은 여성들의 주요 생업활동이었다. 음식 솜씨나 바느질 솜씨 이상으로 길쌈 잘하는 며느리를 으뜸으로 꼽았을 만큼 전통사회에서는 여성들의 길쌈솜씨를 중요하게 여겼다. 시대적 분위기 탓에 전통사회의 여성들은 15~16세 정도의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 길쌈을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기술은 보통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무더위를 이겨낸 노고의 가치를 공유한 길쌈놀이
길쌈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 길쌈과 관련된 길쌈놀이 역시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앞서 소개한 『삼국사기』의 길쌈놀이의 양상이 최근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지역이 충청남도 연기세종특별시이다. 이 지역에는 8월 추석날이면 길쌈의 양을 심사하여 진편에서 이긴 쪽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 길쌈을 마치고 나면 준비한 음식 등을 나눠 먹으며 밝은 달 아래 다 같이 모여 위로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한산모시로 유명한 충남 서천에서 행해지는 ‘저산팔읍길쌈놀이’는 길쌈놀이가 지닌 일반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한산면에 속한 8개 읍의 여성들은 7월부터 8월까지 공동으로 길쌈을 한다. 그리고 길쌈이 끝나면 8개 읍의 여성들이 다 같이 모여 길쌈놀이를 하는데, 모시풀베기-모시삼기-모시날기-모시매기-꾸리감기마당-모시짜기-모시시등급심사-우승자 축하마당 순으로 놀이가 진행된다. 전라남도 곡성 지방에서는 길쌈놀이를 ‘월병연月餠宴’이라 부른다. 이 지역 여성들은 7월부터 8월 보름까지 공동 마적麻績을 하는데, 일련의 작업이 끝나면 각자 팥과 쌀을 거두어 반달 모양의 떡을 빚어 부모님들께 먼저 드리고, 남은 것을 먹으며 밝은 달 아래 춤추며 놀았다고 한다. 물론 길쌈놀이가 이러한 형태로만 전승되는 건 아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작업한 양을 따져 승부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길쌈을 하는 동안 수시로 모여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잠시 놀이를 즐기기는 경우도 있다.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것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이 역시 길쌈놀이의 또 다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역에서 행해지는 길쌈놀이는 개인적 성향보다는 집단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길쌈이 마무리되면 다 같이 모여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놀이를 통해 그간의 노고를 풀어내는 모습은 이 놀이가 지닌 진정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무더운 더위와의 싸움도 버거운데 베틀에 앉아 일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삶은 결코 녹녹치 않았다. 베틀에 앉아 한 올 한 올의 실을 베틀에 놓고 손과 발을 번갈아 가며 옷감을 자아내는 과정은 무척 까다롭고 적지 않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길쌈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노동요[길쌈소리]가 따라올 수밖에 없는데, 길쌈소리의 노랫말에는 봉건사회에서의 고부간의 갈등, 고된 노동, 길쌈노동에서 발휘하는 근면성, 남편에 대한 생각 등이 여실히 표현돼 있다.
놀이를 넘어선 생업활동의 유희이자 축제
전통사회의 7~8월에 행해졌던 길쌈놀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생업활동 과정에서 행해지는 유희이자, 여성들을 위한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남성들 중심의 ‘호미씻이’와 닮은 점이 많은 공동체 놀이라 할 수 있다. 길쌈놀이의 공동체성은 결국 제한된 시간에 길쌈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느 마을이나 할 것 없이 길쌈이 시작되면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두레 길쌈’을 조직하여 서로 일손을 돕는다. 개별 지역에서 길쌈놀이를 ‘두레삼’ 혹은 ‘두레길쌈’, ‘두레미영무명’이라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길쌈놀이가 지닌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한 달 동안 이어져온 생업활동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서로 음식을 나눠 먹으며 그 동안의 노고勞苦를 달랜 부분이라 생각된다. 한편으론 단조롭지만 집중력을 요하는 길쌈 과정에서 능률을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이 놀이가 행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워 보인다. 여성들의 놀이인 길쌈놀이가 왜 하필 한 달 동안4)의 작업량으로 승부를 겨루었는지에 대한 부분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호미씻이가 끝나는 바로 다음날인 7월 16일부터 길쌈이 시작된 부분 역시 한 번쯤 주목했으면 한다. 우리네 속담 중에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는 것이 있다. 이 속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전통사회에서의 7월과 8월은 농한기農閑期에 해당된다. 무엇보다 7월과 8월은 모내기와 김매기 등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며 다가올 풍년을 기약하는 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마을의 여성들이 길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농한기에 옷감을 짜놓아야 추석 이후에 농작물의 수확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 마을 여성들이 두레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길쌈 솜씨를 경쟁할 수밖에 없었던 핵심적인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길쌈을 행하는 시기에 따라 옷감의 질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보통 농한기인 여름과 겨울에 길쌈을 많이 했는데, 여름과 달리 겨울철에 길쌈한 옷감은 올이 쉽게 끊어질 뿐만 아니라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런 연유로 김매기 등으로 인한 피로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여성들은 길쌈에 매달려야만 했다. 무더운 더위와 수시로 찾아오는 졸음은 길쌈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견뎌야 하는 또 다른 삶의 무게였을 것이다. 합성섬유를 비롯해 값싸고 질 좋은 옷감이 등장하면서 길쌈을 비롯한 관련 문화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일부 지역에서 무형문화재의 하나로 길쌈 문화가 전승되고 있는 정도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많은 이들이 길쌈과 이와 관련된 문화에 관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형태로든 현대적인 관점에서 길쌈놀이를 비롯한 관련 문화가 여러 형태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이 과정을 통해 길쌈과 길쌈놀이가 지닌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재조명되길 기대해 본다.
1) 『三國史記』卷1, 儒理尼師今
2) 조선 헌종 때
3) 김형수, 19세기
4) 음력 7월 중순부터 8월 보름까지
글 | 서종원_문학박사, 도봉학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