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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 대담 | 소리로 이야기하다

소리로 이야기하다, 판소리꾼과 래퍼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판소리와 1970년대 중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랩Rap. 언어부터 리듬까지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거처럼 느껴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장르는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소리로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과 정서를 담은 이 두 개의 다른 소리는 전통과 현대라는 행간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은 같은 줄 위에 새겨져 있다. 같은 듯 다른 ‘판소리와 랩’. 이 두 소리의 간극과 본질을 살펴보기 위해 정회석 명창과 래퍼 아펠리아ApheLiA를 만나보았다.

판소리와 랩은 어떤 음악인가요?
판소리꾼 판소리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라는 뜻의 ‘판’과 노래를 뜻하는 ‘소리’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판소리를 놀이가 아닌 소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안에 귀뚜라미 소리, 천둥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부터 여인이 목 놓아 우는 소리 등 우리 삶 속의 모든 소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표현할 줄 알아야 하죠. 판소리의 매력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창자唱者는 부채를 들고 무대에 홀로 서서 극 속의 인물이 되었다가 극을 진두지휘하는 연출가로도 변신합니다. 영화 속에서 적벽대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물과 소품이 화면 속에 등장해야 하지만, 판소리에서는 창자 혼자 모든 것을 다 표현하죠. 매우 신비한 장르가 바로 판소리입니다.

 

래퍼 랩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사회적 박탈감과 차별을 리듬으로 승화시키면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다른 음악 장르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좀 더 직설적이고 자유롭게 표현합니다. 일부 래퍼의 경우 가사 속에 비속어를 넣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랩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비속어 역시 주제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인정되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랩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됩니다. 또 랩은 멜로디 없이 박자와 리듬으로 가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죠. 때문에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할 때 역시 읊조리듯이 나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가사를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것 같아요.

 

판소리와 랩이 내야 할 소리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판소리꾼 어떠한 소리든 진심이 담겨야 진솔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 판소리 대회 전날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심청가를 부르려는 제게 “네가 심청가를 부르는데 효를 하지 않는다면 그 소리는 죽은 소리다. 그러니 나에게 효도를 해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점수를 얻는 방법을 기대하던 저에게는 엉뚱한 소리로 들렸지만, 아버님은 소리에 진심을 담아 부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꾸미는 것에 치중해 본질을 잊어버리면 가사 속의 의미는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기에 판소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소리’로 나타내야 합니다.
래퍼 저 역시 ‘솔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랩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는 장르이다 보니 자신의 이야기 또는 전하고 싶은 생각을 남에게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해요. 이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작사해야 노래할 때 우물거리지 않고 청중의 귀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가끔 랩을 알아가려는 어린 친구들이 조언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 친구들에게 ‘가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솔직함이 곧 공감이다.”고 답해요.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진솔하게 전달한다면 절로 듣는 이의 공감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죠.

판소리와 랩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판소리꾼 판소리는 평생 ‘수련’을 이어가야 합니다. 만약 완창이 목표라면 2년만 배우더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2년을 수련한 소리꾼과 20년을 수련한 소리꾼이 표현하는 소리의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죠. 또한, 판소리는 극 속의 모든 상황적 요소를 전부 표현해야 합니다. 만약 ‘벽력같은 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면 말 그대로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큰 소리를 내야 하는 거죠. 단어 속에 내포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끝없는 수련이 필요한 겁니다. 매일같이 수련을 반복하여 예술적 표현력을 구축하게 된다면 바로 ‘득음’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죠. 저 역시도 부족한 부분을 충족시키기 위해 언제나 수련하고 있답니다.
래퍼 언제나 세상에 새로운 것을 내보여야 하는 래퍼들은 다양한 장르를 듣고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새로운 음악으로 음악적 식견을 넓히는 것이죠. 저 역시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음악이 축적되어야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기에 어색하고 낯선 장르라도 한 번쯤은 듣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도전이 랩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음악적 깊이를 더해줍니다. 최근 유튜브에 커버곡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더욱 다양한 소리에 도전하여 랩의 깊이와 폭을 넓히기 위함입니다. 나와는 다르게 표현하는 이들의 음악이 또 다른 자극제가 되어 끊임없이 창조해낼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있어요. 이러한 시도를 통해 공간과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있죠.

지금까지 활동 가운데 두고두고 회자되는 순간은?
판소리꾼 판이 이루어지려면 명창과 명고名鼓 그리고 귀명창1)이 필요합니다. 소리를 듣고 시기적절하게 추임새를 넣어주는 귀명창이 있으면 창자도 신명나게 극을 이끌기 때문이죠. 제게 춘향가를 사사해준 성우향 명창이 관객으로 오고는 했습니다. 아주 적절한 순간에 흥을 돋우는 추임새를 넣어주어, 무대 위에서 힘을 받고는 했습니다. 오래 전 추억 속에서 또 한 분을 떠올려보면, 고법鼓法 예능보유자였던 김명환 선생님입니다. 살아생전 선생님은 저의 조부祖父님인 정응민 명창과도 공연하고 아버님인 정권진 명창과도 공연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간 대회에 함께 무대에 올랐으니, 저희 집안 3대와 함께 하였죠. 저희와 인연이 깊은 분이라 더욱 기억에 남네요.
래퍼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랩은 젊은 세대가 이해하고 즐기는 장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선입견이 단번에 깨진 무대가 있습니다. 함께 활동하던 팀과 축제에 초청되어 간 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관객이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라 공연을 잘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호응이 뜨거웠어요. 특히 한 할아버지께서는 무대 앞으로 나와 저희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죠. 덕분에 저희 역시 흥겹게 무대를 마치고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 무대를 통해 음악을 즐기기 위해 나이와 장르는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음악의 힘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어요.

다른 장르와 결합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판소리꾼 소리가 다음 세대로 이어가기 위해서 다른 장르와의 결합은 필요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그 바탕에 소리가 탄탄하게 잡혀, 전통 판소리가 파괴되지 않은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새로운 시도를 통해 집중시킨 이목으로 판소리를 주도적으로 이해하고, 창자와 추임새를 주고받으며 맛깔스러운 판소리를 만들 수 있도록 조력해주는 귀명창들이 늘어날 수 있는 방향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래퍼 개인적으로 장르적인 협업을 통해 익숙하지 않은 장르를 경험할 수 있어 좋아합니다. 언젠가 트로트에 들어가는 랩파트를 작업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매우 즐겁게 작업한 기억이 있습니다. 트로트의 리드미컬한 리듬에 랩의 박자감이 더해져 조화를 이루는 게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이처럼 랩은 발라드, 댄스/팝, 포크/어쿠스틱 등 어떤 장르를 만나더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 같습니다.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 나아갈 방향은?
판소리꾼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판소리를 가르쳐 전승해야겠다는 마음이 깊어졌습니다. 현대로 들어설수록 점점 변화하고 있는 전통 판소리를 바로잡아 그 계보를 잇고 싶습니다. 한문이 익숙한 저희 세대가 받아들이는 문자의 의미와 한문이 익숙지 않은 요즘 세대가 받아들이는 의미가 점점 달라지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소리가 점차 변화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심청가와 수궁가 등 다섯 바탕에 대한 선대 악보집을 발간하여 잡아가려고 합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판소리 사설집까지 남기고 싶네요.
래퍼 우리에게 음악은 삶의 스타일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요소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각자의 경험이 달라 같은 음악도 다르게 느끼지만, 음악은 모두를 즐겁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듣는 사람도, 부르는 저도 즐거운 음악을 발표하려고 합니다. 저의 가장 최근의 생각이 녹아있는 앨범을 성공적으로 발표해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앨범 발표와 더불어 사람들과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튜브 채널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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