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PDF 박물관 바로가기

국수

대한민국 국수의 근원을 찾다

세상 모든 문명과 민족은 제 나름의 국수를 갖고 있다. 곡물을 말려두는 것은 당연한 보존법이고, 곡물을 빻고 무엇을 만들까 고민하다 보면 의식의 흐름대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 국수이기 때문이다. 곡물을 빻은 가루를 물에 개고 이런저런 모양을 만드는 것이 국수의 골자다. 곡물 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내거나 동그랗게 굴리거나, 납작하게 밀어 칼로 자른 후 밋밋한 반죽을 육수에 말거나 고명, 소스와 비비면 국수의 형식이 완성된다.

국수 각각의 차이는 오로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쌀이 흔한 곳에선 쌀국수, 밀이 잘 자라는 지역에선 파스타나 소면이 나왔다. 메밀밖에 자라지 않는 척박한 산간에선 메밀면이 나온다. 한국에서 쌀은 잔치할 때 떡을 빻거나 밥 지을 것밖에 없었고, 밀은 귀했다. 잘 자라는 곡식은 메밀이었다. 감자나 고구마도 메밀과 한 짝으로 잘 자라 퍼석한 메밀에 찰기를 더하기가 쉬웠다. 그리하여 춥고 박한 북쪽 지역에서 냉면이 탄생했다.

메밀 면과 찬 육수의 만남, 평양냉면

지난 10여 년 동안 평양냉면의 ‘팬덤’이 유독 요란해졌다. 그런데 최근 냉면 애호가들의 관점에 경천동지가 일어났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평양의 대표적인 냉면집인 옥류관 냉면의 자태가 대중에 알려진 것이다. 한국의 냉면, 즉 서울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평양냉면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꿩고기 중 각각의 식당 내력에 따라 재료를 조합하고 각종 채소를 더해 맛을 보태고, 간혹 동치미 국물을 섞기도 하고 소금 간을 더해 만든 차고 맑은 육수에 메밀 70~80% 이상, 전분 20~30% 이하의 뚝뚝 끊어지는 물성을 가진 압출면을 말아 먹는 것으로 고착돼 있다. 이북에서 유래했다는 원조 냉면집들이 대략 그러해서 신생 냉면집들도 여지없이 벗어나지 않는 특징을 띠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평양냉면이라 믿고 싶었던 평양냉면이다.

그러나 매체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된 옥류관 냉면의 모습은 놀라웠다. 새카맣고 쫄깃해 보이는 전분 함량 높은 면에, 육수 색깔은 거무튀튀해 간장이 들어간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보다도 새빨간 다대기 양념장을 곁들여 먹었다. 그간 믿었던 평양냉면의 모습과는 어느덧 판이하게 변해 있는 것이 현대 평양의 평양냉면이었다.

망향의 정서를 담고 남북이 하나이던 때의 원형을 신봉하던 ‘면스플레인 ‘냉면’과 ‘익스플레인(explain;설명하다)’의 합성어로, 냉면은 반드시 어떻게 먹어야한다고 가르치는 언행을 의미하는 신조어’이 모두 힘을 잃게 된 일이었다. 고종이 겨울밤이면 친구 삼았다는 고서 속 냉면, ‘아지노모토’가 발명되어 한국에 대대적으로 진격한 이후 감칠맛을 쉽게 내게 된 일제강점기의 배달 냉면,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민들이 고향 맛을 그리워하며 차린 냉면집들로부터 이어지는 근대의 서울 평양냉면의 신성한 계보가 모두 무색해졌다. 그러나 그건 동시에 시원하고 후련한 일이기도 했다. 메밀 면과 찬 고기 육수라는 원형에 각자의 시절과 상황에 맞는 변형이 가해져 작금의 냉면이 된 것이라는 합리적 인식이 냉면에 들어섰다. 육수 내는 고기가 달라졌고 땅에 키우던 무의 성질이 달라졌고 메밀이 더 이상 흔한 작물이 아니게 된 변천도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냉면과 선을 긋고 구분했던 막국수나 밀면이 모두 냉면의 한 가족이라는 진심의 동지의식도 생겼다. 모두가 그저 찬 국수, 냉면冷麵일 뿐이다.

강원도 막국수, 부산 밀면, 제주도 고기국수

‘국수는 하나’라는 화합의 관점으로 남녘의 국수를 다시 돌아보자. 좁은 반도임에도 지역마다 기후가 다르고 땅이 달라 다양한 국수 형태가 발전해 있다. 강원도의 막국수는 북녘의 냉면과 가장 밀접하게 통해 있다. 메밀과 전분으로 뽑아낸 면을 육수에 말고, 양념장을 듬뿍 얹어 매콤달콤하게 먹는 것으로 고정됐다. 비빔 막국수와 함흥냉면의 연관 관계를 떠올려 봐도, 면과 고명에서 상황이 다를 뿐 근원적인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순수’를 추구하는 어떤 막국수 문파의 면은 메밀 100%에 진한 고기 육수로 귀결돼 있어 사실상 서울의 뭇 평양냉면이라는 것들과 구분하기 힘들다. 춘천 산간지역의 막국수를 계승했다는 어느 식당의 냉면은 순면에 국간장으로 간을 본 맑고 옅은 육수를 사용한다. 현대 서울식 냉면과 현대 평양식 냉면, 현대 막국수가 혼합된 결과물이다. 이 집엔 들기름과 국간장으로 순 메밀면을 비벼 먹는 국수요리도 있는데 이 또한 하나의 변형에 속한다.

강원도에 막국수가 있다면 부산에서는 밀면이 발전했다. 전쟁 후 경제 재건기에 보급되고 장려된 밀가루로 냉면의 밀가루 버전을 만들어 먹었다. 밀면은 면뿐 아니라 육수에서도 지역 최적화가 이뤄졌다. 지천으로 흔한 멸치를 사용해 육수에 짙은 단맛과 감칠맛을 보탠 것이다. 이 국물이 뜨거워지고 면이 얇아지면 멸치국수와 성질이 비슷해진다. 흔히 ‘잔치국수’라고 부르는 형식이다. 진하게 우린 멸치 육수에 바닷바람에 말린 밀가루 소면을 훌훌 말아 적당한 고명을 얹어 먹는, 전 국민의 ‘비 오는 주말 점심 메뉴’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제주로 바다를 건너면 냉면과 밀면과 멸치국수의 연결고리에 고기국수가 이어진다. 돼지고기를 위주로 진득하게 우려낸 육수에 밀가루 중면을 말고 돼지고기나 배추 등 제주의 흔한 식재료를 말아 먹는 뜨거운 국수다. 제주에선 다시 메밀이 등장한다. 논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성긴 땅의 제주는 메밀의 주산지다.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꿩 고기로 낸 육수에 메밀가루를 타 꾸덕꾸덕한 국물을 만들어 말아 먹는 요리가 있다. 꿩은 한반도 천지에 흔한 야생 재료였다.

국수는 모두 하나다

냉면부터 고기국수까지, 뜨겁거나 차갑거나 결국 국수는 모두 하나다. 각기 주변에서 허용한 것을 가장 맛 좋고 귀중하게 먹는 방법으로 고안한 결과가 각 지역의 국수 요리다. 처한 자연의 차이가 각자의 국수에서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 있을 뿐이다.

훈훈한 연결고리 하나. 자연의 영향이 아닌 사회경제적 환경의 영향으로 발생한 국수 요리도 있다. 안동의 안동국시다. 물은 풍부하고 드넓은 땅은 기름진 안동 양반의 권세가 어디 보통이었겠는가. 귀하게 취급되던 밀가루로 면을 지어 먹는 여유마저 있었던 안동에서는 만인이 평등해진 지금도 여전히 귀한 손님을 안동국시로 대접하곤 한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가늘게 잘라낸 면을 소고기, 닭고기, 꿩고기 등으로 만든 육수에 뜨끈하게 말아 먹는 국수 요리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이해림│음식 칼럼니스트

더 알아보기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등록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