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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우리나라 최초 외국인 사교 클럽, 제물포구락부

인천역에 내리면 눈앞에 차이나타운이 펼쳐진다. 차이나타운을 굽이굽이 돌다 보면 계단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이라 부르는 이 층계의 왼쪽 지역으로는 옛 중국의 흔적이, 오른쪽으로는 일본의 흔적이 물씬 느껴진다. 계단의 끝은 응봉산 자락에 넓게 자리 잡은 공원으로 이어진다. 1883년,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근대적 개항을 맞이한 인천은 외국인 전용 거주 공간인 ‘조계租界’를 설정하였다. 일본에 이어 청국이 조계 설치와 관련된 계약에 조인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의 공동 조계인 ‘각국조계’가 설치되었다. 지금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는 중국풍의 지역이 청국조계, 일본풍의 지역이 일본조계였다. 그리고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위의 자유공원 일대가 각국조계가 있던 곳이다.

1884년에 조인된 「인천항 제물포 각국조계 장정」에 따라 각국 조계 내의 도로와 토지를 구획하면서 응봉산 정상에 서구식 공원을 계획하였다. 우크라이나 출신 건축가 사바찐Sabatin이 설계를 맡은 이 공원은 1888년 ‘각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하였다. 바로 현재의 자유공원이다.

이방인들을 위한 사교의 장

각국조계는 여러 나라의 공동 조계였던 만큼 공동의 행정기구가 필요했다. 1889년 인천 감리와 영국·미국·독일·청·일본 5개국 대표가 모여 자치기구인 신동공사紳董公司를 만들어 공동의 이익을 추구했다. 1891년 신동공사는 회원국의 원활한 교류를 위하여 지금의 관동 1가에 목조 단층건물 형태의 회관을 짓는데, 그것이 지금 제물포구락부의 기원이 된다. 제물포구락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 사교클럽이었다. 1894년 결성된 정동구락부보다 3년이 앞섰다.

증가하는 외국인 수에 비해 회관이 협소하다는 의견이 늘자, 제물포구락부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전을 계획한다. 각국공원 아래에 터를 마련하고 공원을 설계했던 사바찐에게 다시 회관의 설계를 맡겼다. 1900년부터 1901년까지 이어진 공사 끝에 2층 벽돌조 형태의 새로운 회관이 건립되었다. 일본식 합각 지붕과 맨사드 지붕을 올렸으며, 마감 재료는 양철을 사용했다. 제물포클럽Chemulpo Club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구락부’의 음역어인 구락부俱樂部를 붙여 이 건물을 ‘제물포구락부’라 불렀다.

각국조계의 면적은 약 14만 평이었는데, 제물포구락부가 개관할 당시 개항장 인구 17,507명 중 서양인들은 75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은 대개 영사관 직원, 해관 직원, 통역사, 선교사, 상인 등 조선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유력 인사들이었다. 서양인들의 국적은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9개국으로 나뉘었다. 제물포구락부는 이들의 새로운 사교장이 되었다.

제물포구락부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근대사

1901년부터 1905년 사이 호머 B. 울베르에 의해 매달 발간되었던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라는 간행물이 있다. 그 지면에 1901년 다시 문을 연 제물포구락부 개관식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901년 6월 22일 토요일 오후 4시 30분, 새 제물포클럽의 개관식이 열렸다. 내빈들이 모이자 H.N.알렌 여사가 은 열쇠로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내빈들이 건물 내부의 멋진 방과 시설들을 살펴본 후, 영국 영사 고페Herbert Goffe는 메서스Messrs, 사바찐Sabatin, 데쉴러Deshler, 뤼일르스Lührs의 공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구락부 건물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 설명을 했다. 곧 이어 그는 알렌 여사에게 클럽의 개관을 선언하도록 요청하였다. 모두들 대단한 감격 속에서 이 건물을 위하여 건배했다. 고페는 “알렌 여사와 숙녀들을 위하여”라며 축배를 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응했다. 이후, 은제 열쇠는 알렌 여사에게 이 행사의 기념품으로 선사되었다. 이 건물은 전망이 좋고, 넓은 당구장과 독서실, 그리고 근처에 테니스장이 갖추어져 있으며, 성장하고 있는 제물포 사회의 색다른 장식이 됐다.”

이 기록 중 개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모가 흥미롭다. 알렌 여사는 제물포구락부 개관식 바로 전날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알렌의 부인이었다. 영국 영사 고페가 건물을 설명했고, 알렌 여사가 개관을 선언했다. 고페가 이 클럽의 개관에 공헌했다고 언급한 사람은 영국계 무역상사인 이화양행의 메서스, 우크라이나 건축가 사바찐, 미국 사업가 데쉴러, 독립계 무역상사인 세창양행의 뤼일르스였다. 제물포구락부의 개관에는 개항 이후 한국에 모인 각국 유력자들의 기여가 있었다.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제물포구락부는 개항장 ‘핵인싸’들의 ‘핫플레이스’이자 아지트였다. 각국 인사들은 인천 앞바다가 보이는 이곳에서 경관을 즐기며 차를 마셨고, 당구와 테니스 등 여흥을 즐기며 여가를 보냈다. 무도회도 곧잘 열렸다. 고종황제의 시의侍醫였던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박사의 기록에 그때 제물포구락부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성탄절 저녁 볼터씨 댁에서 독일어 교사 볼리안씨와 함께 보내느라 일부러 제물포까지 가서 밤을 새웠습니다. 성탄절에는 미국인과 프랑스인을 방문했고, 저녁에 그곳에 있는 영국 영사의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고 춤도 추었습니다(1901년 12월 27일). 제물포클럽에서는 보름마다 무도회가 열리는데, 모이는 사람은 잡다하지만 사람과 사귀는 것은 흐뭇하다고 말씀드렸지요(1902년 3월 3일).”

외교와 야합의 장이 이제 공존의 상징으로

제물포구락부의 기원이 되는 신동공사의 회관에 모였던 이 인사들을 포함해 이곳에서 사교활동을 하며 편의시설을 즐겼던 인물들은 각국의 세력가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은 외교의 장이자 ‘야합’의 장이 되었다. 각국 인사들은 자기 나라와 자신의 이권을 위해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전략을 펼쳤다. 때론 이곳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때론 갈등의 조정이 이뤄지기도 했다. 후에 제물포 정략Chemulpo Politics이라는 말로 국내외에 전파되었듯, 이곳은 공식적인 외교와 비공식적인 야합이 혼재하는 곳이었다.

제물포구락부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폐장하게 된다. 1905년 승전한 일본은 1914년 개항장 일대의 조계를 없앴다. 회원국들이 귀환하자 기능을 잃은 제물포구락부는 문을 닫았다. 이후 건물의 용도는 여러 번 바뀌었다. 정방각, 일본부인회, 미군장교구락부 등을 거쳐 1953년에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다.

제물포구락부가 옛 역사와의 접점을 다시 찾은 것은 2007년 6월 새 단장을 마친 후였다. 이제 이곳은 옛 회원국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와 문화교류를 펼치는 한편, 근대 인천의 역사를 알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과거 개항도시 인천과 21세기 국제도시 인천 사이의 접점으로서 제물포구락부는 여전히 흥미로운 공간이다

* 이 글은 외부 필진이 작성하였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_손민환│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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