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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일지

동포, 고려인의 목소리

 

재외한인동포 생활문화 조사

2016년 기준, 세계 인구의 3%에 이르는 2억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가 힘이 없던 시절 이역만리 타국 땅으로 끌려간 강제 이주부터, 먹고 살기 힘든 열약한 경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택한 ‘드림형 이주’, 그리고 더 낫고 윤택한 삶을 꿈꾸며 새로운 가치에 투자하기 위한 최근의 신 이주까지, 우리의 이주 역사는 150년을 넘어서고 있으며 181개 국가에 720만 명의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각지로 이주한 연유와 시기가 다르고 지역도 다르다. 고국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그 마음은 같을 수 있으나 이를 제외하고는 큰 공통점을 갖기가 힘들다. 이렇듯 이주 배경이 다르고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으로 간극이 있는 세계 각지의 한인들을 민족적 뿌리를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재외동포 연구를 추진함에 있어 지역별, 이주 특징별로 동포 사회를 구분하여 연차적으로 접근하는 이유이다.

고려인 : 본적은 조선, 출생지는 연해주,
자란 곳은 중앙아시아, 재정작한 고향 연해주

필자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재외 한인동포 생활문화 조사의 일환으로 2015년~2016년까지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인 ‘고려인’들의 생활문화에 대해 현지조사를 진행하고 민족지를 발간하였다. 연해주 지역은 1860년대부터 이루어진 만주·연해주로의 한민족 초기 이주지이며, 국가가 힘이 없던 시절인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1956년 거주이전 제한 철폐, 1991년 소련 해체 등의 사건 때 연해주로 재이주를 한 러시아 동포, ‘고려인’들의 질곡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의 이주 1세대는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1920년대 초반에 부모와 함께 이주해온 일부 고려인들은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제 이주 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1세대, 중앙아시아에서 출생하여 성장하고 살다가 다시 선조의 고향인 연해주로 재이주를 한 2, 3세대. 그리고 러시아가 고국이라고 생각하는 최근의 후세대들까지, 그들의 타향살이 160여 년의 이야기와 현재를 살아가는 생활문화의 양상을 담아낼 수 있는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재외동포 ‘고려인’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 ‘고려인의 목소리’를 담아내었다.

강제 이주열차를 탄 열세 살 소녀
굶어죽은 아이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은 감자껍질
옥수수이미지

김 알렉산드라 할머니 _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우수리스크에서 만난 김 알렉산드라(1924년 생) 할머니는 1937년 9월에 있었던 끔찍한 강제이주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녀는 고향인 평양에서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를 해 왔는데, 어머니는 병에 걸려 사망을 했고, 열세 살 이던 1937년 9월 21일에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이주하였다.

ee_말따옴표1937년 스물 하루에 막 실려 갔어. 아무것도 가져갈 필요 없다고 해서 집이고 다 내 버리고 갔지. 짐칸에 실려서 짐처럼 갔어. 우리는 집에서 떡을 구워가지고 가서 그거 먹었는데 아무것도 안 가져온 사람들은 나눠 먹다가 나중에는 먹을게 없어서 애들은 굶어 죽었어. 그러면 그 죽은 애를 기차 밖으로 던지고 그랬어.

나랑 같은 칸에 탄 영감 노인네는 기차 섰을 때, 그 밑으로 오줌 싸러 들어갔다가 기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끼어 죽기도 했어. 그렇게 고생했어.

 

타슈켄트에 도착하면 집과 땅을 주겠다며 집문서와 땅문서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던 군인들이, 목적지에 도착하니 삽과 괭이를 던지며 이것이 너희 집이고 땅이라며 말을 바꾸기도 하였다. 어쩔 수 없이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은 그 삽과 괭이를 이용해 땅을 파고 위에 짚을 덮어 그 안에서 생활을 하였다. 식수가 부족해 늪의 물을 마셔 많은 사람들이 설사를 하고 피똥을 쌌으며 감기를 늘 달고 살았다. 아이들은 홍역을 앍았고, 식량이 부족해 쓰레기통을 뒤져 갑자 껍질을 먹기도 하였다. 또한 원주민이 준 말 젖을 먹고 죽기도 하였고, 독사와 독거미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참담한 생활을 하던 고려인들은 특유의 성실함과 끈질김으로 집단 농장에서 높은 생산량을 기록하며 일 잘 하는 인력으로 인정받았고, 이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착해 갔다. 밤낮없이 일을 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 교육에 힘을 쏟아 지역 사회에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이내 세대를 거치며 전문직에 종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고려인들이 배출되었으며 러시아 사회에서 인정받는 소수민족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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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흔적과 변화 :
고려인 DNA, 음식과 풍습

우수리스크 고려인들은 한국어 사용을 거의 하지 못할 정도로 현지 사회에 동화되어 살아오고 있으며, 20~30대인 4세대들의 경우에는 한국을 모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생활 모습에는 고국의 흔적이 진하게 베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음식이다. 고려인들은 일상적으로 바이무리(밥에 물을 말아 먹는 것), 김치, 고춧잎, 당근김치, 북짜이(고기된장찌개), 시락장무리(시래기국), 떡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 이는 4~5세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사 과정에 만난 20대의 4세대 고려인 청년은 “나는 러시아 사람이다. 선조의 고향이 한국의 대전이라고 들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곧 이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시락장무리와 떡이고, 나는 돌잔치와 환갑잔치는 꼭 치러야 하는 의례라고 생각한다.”고 말을 한다.

실제로 2016년 우수리스크 고려인 사회에서는 돌잔치와 환갑잔치를 반드시 치르고 있었다. 자녀들로부터 환갑잔치를 거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인생을 잘못산 것과 같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으며 돌잔치 역시 절대로 거르지 않는 고려인들의 의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최근 간소하게 치르는 돌과 환갑잔치를, 고려인들은 가장 중요한 의례로 여기며 무리하며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까지 치르고 있었다. 세월의 변화 속에 조국에서는 간소화 된 의례를, 오랜 기간 동안 조국과 단절되어 살아온 고려인들은 고향의 전통이라며 어김없이 지켜온 것이다. “우리의 DNA가 고려인임을 영원히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음식과 돌, 환갑잔치를 통해서다.”라는 고려인 할아버지의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재외 한인동포 생활문화 현지조사를 지속하고 있다.

1) 자세한 내용은 조사보고서 <고려인의 목소리> 참조.

| 조사보고서 <고려인의 목소리> PDF – 바로가기
글_강경표 │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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