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사진을 배우느라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던 고등학생 때였다. 사진깨나 한다는 선배 하나가 “사진이란 이런 거야!”라고 한마디 내뱉으며 눈앞에 사진 한 장을 디밀었다. 최민식 작가의 ‘자갈치 아지매’라는 제목의 사진이었다. 보기만 해도 훅 하고 비린내가 코끝을 지릴듯한 고기상자에 둘러싸인 자갈치 아지매들의 얼굴이 또렷했다. 칼라가 유행이던 시절에 묘한 흑백의 힘이 느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꼼장어 먹으러 그렇게 자주 들락거리면서도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자갈치의 정취가 뭉클하게 가슴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그 때 본 ‘최민식’이라는 이름 석 자가 뇌리에 각인되었고, 한 때나마 그런 ‘휴먼 리얼리티’를 흉내 내려 애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가면서 사진은 그만 두었고, 이내 사진에 대한 내 청년기 기억은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져 갔다.
어언 40년만이다. 풍성한 사진들로 구성된 도록 『한반도와 바다』에서 최민식을 재회했다. 도록에는 내 청년기의 충격이었던 ‘자갈치아지매’와 더불어, 이제는 이름조차 생소해져 가는 ‘깡깡이아지매’가 턱하니 수록되어 있었다. 도록을 보면서 나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감흥에 싸였다. 뇌리를 맴돌던 최민식이 여전히 ‘인물’이나 ‘휴머니티’ 범주였을 뿐, ‘바다’와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렇다. 내가 이 대학에 몸담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바다에 대한 인식이나 열정 따위는 그다지 없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던가? 이 대학에 부임하고 나서부터 내 삶의 조건들이 항상 나를 바다와 엮어 내곤 했었다.
바다의 눈으로 보는 사물과 세상은 시계視界가 달랐다. 최근 부산시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공모된 ‘예술상상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된 ‘깡깡이마을’은 문화예술협동조합플랜비가 애쓴 덕에 차츰 성과를 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도록에서 만난 최민식의 ‘깡깡이아지매’가 여전히 바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던 나를 질책하는 듯하다.
인류에게 바다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까마득한 어둠과 거친 파도 너머에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공포, 모험과 희망이 교직되고 착종되는 이상향이었을 것이다. 서양의 신화에는 바다와 관련된 신神이나 신들의 이야기가 매우 풍부한 데 반해, 동양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를 비롯한 동양 세계는 바다와 친연성이 더 적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중국에 바다와 관련된 거의 유일한 「정위전해精衛塡海」라는 신화가 존재한다.
신농神農의 둘째 딸인 여왜女娃가 동해로 놀러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그의 영혼이 정위精衛라는 작은 새로 부활해 매일 서쪽 하늘에서 작은 돌과 나뭇가지들을 물어다가 거칠게 날뛰는 파도 위에 떨어뜨려 동해를 다 메우려 했다고 한다. 무모할 뿐더러 바다에 대한 적개심으로 충만해 있다. 기나긴 해안선을 가진 중국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바다를 멀리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중국이 바다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은 불로초를 찾기 위한 진시황秦始皇의 해양탐험이 있은 이후 끊겼다가 명明대의 정화鄭和에 이르러서 잠깐 반짝한다. 그러나, 중국역사를 통틀어 바다로 나아간 것은 단 몇 차례에 불과하다. 바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훨씬 컸다는 이야기이다. 자유나 모험의 추구를 달가워하지 않는 봉건 유교질서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어찌됐건 이러한 전통의식은 유교를 중시하는 한반도에 전파됐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결국 갯가를 하대下待하는 풍습으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_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역사는 일본과도 다르지만 중국과도 또 다른 나름의 문화와 전통을 가져왔다. 적어도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를 살았던 선조들이 거친 파도와 싸우며 고래를 사냥했던 흔적을 간직한 반구대 암각화는 한반도 주인들의 차원 높은 해양성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으로 육지생물에 관한 암각기록은 다량 남아있지만, 해양생물의 암각화는 사례가 희소하다. 이것이야말로 한반도 주인들이 해양형 인류라는 상징이 아닐까?
사실, 우리의 역사민속 유물유적 중에 바다와 관련된 것은 적지 않다. 회화, 조각, 도자, 부채 등의 예술작품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보면 우리 선조들의 바다에 대한 동경과 이해의 폭과 깊이를 이해하게 해준다. 이외에, 우리 생활 속에 남아있는 바다이야기는 차고도 넘친다.
조선 태종1402 때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를 보면서 선조들이 이미 대륙형 사유를 넘어 해양형 사유를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광대무변한 동아시아 해역을 넘어 인도양을 지나 아프리카까지 사유 범주가 미치고 있음은 해양형 사유를 차치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바퀴를 드는 이들이 있다. 바퀴야말로 지표면과의 마찰계수를 극소화해 이동의 속도를 높이는 데 크나큰 기여를 한 발명품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바퀴보다 마찰계수가 더 적은 운송수단을 발명해 두고 있었다.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목선이다. 물에 떠서 미끄러져 가는 탈 것이다.
망망대해를 바라만 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빨려들 듯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배와 항해술로 바다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소통과 교류 그리고 물류는 선박을 통한 운송이 으뜸이었고, 우리에게는 찬란한 해운의 역사가 있었다. 8~9세기 동아시아 해상교통 및 물류권을 장악했던 장보고張保皐의 해상권은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강력한 해양력이었다. 오늘날 세계유수의 조선/해운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선조들의 DNA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까?
고대 해상교류의 증거들은 새로이 발굴되는 동전, 자기 화병, 수저, 목간, 벼루 따위의 해저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록 『한반도와 바다』에는 우리 역사 속의 바다이야기가 풍부하게 복원되어 있다. 우리의 예술, 문학, 민요 그리고 산업 등 다양한 해양풍경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남아 있어 더욱 바다 가까이로 우리를 이끈다.
바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자. 대륙형 사유체계를 벗어나 해양적 사유체계를 수용하자. 바다는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버림과 원망의 공간이 아니라, 교류협력과 상생의 공간이다. 바다는 모든 것을 품어내는 어머니요, 모든 것을 소통하게 하는 거대한 생명의 공간이다. 그렇듯, 바다에는 선조들의 역사와 문화 예술이 살아 숨쉬고, 아울러 인류의 미래 희망이 담지되어 있다. 오래 전에 출판된 『한반도와 바다』에서, 참으로 ‘오래된 미래’를 확인한다.
1961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1996년, 중국 베이징대학 대학원 중문학과에서 『20세기 전반기 중국 지식인 소설과 풍자정신20世紀前半期中國知識分子小說與諷刺精神』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한국해양대학교 국제대학 동아시아학과에 재직하면서 중국문학과 중국문화, 해양문화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해양대학교 언론사 주간, 교무부처장, 국제교류원장, 국제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지금은 최고인문학과정 원장을 맡고 있다. 『변화와 생존의 경계에 선 중국지식인』2004, 『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2011, 『중국영화로 만나는 현대중국』2012, 『중국에게 묻다』2012 등 저서와 해양문화개론서 『바다가 어떻게 문화가 되는가 – 21세기 중국의 해양문화 전략』2008, 현대미술평론집 『홀로 문을 두드리다 : 오늘의 중국 문화와 예술 들여다보기』2012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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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하고 고물 카메라 한개들고 한개업고 까불랑거리던 그시절이 그립소!!
그중에 한사람은 중어중문학의 대가가 되고.또한놈은 힘든 제조업.유통및 설비업을하고 있으니 인생무상이요.
그시절 다시 오지는 않을끼고 가까운 미래에 사진기들고 들로 산으로 나가고 싶어요.
우리 김학장님!! 건강.건승하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