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옷 한복은 중국의 치파오나 베트남의 아오자이, 일본의 기모노와는 그 구성부터 다르다. 이들은 모두 상의와 하의가 연결된 원피스 스타일이다. 특히 치파오나 아오자이는 여성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옷을 입는 대상에 의해 미가 결정된다. 결국 젊고 몸매가 좋은 여성이 입었을 때 찬사를 받게 된다. 물론 기모노와 같이 심지어 여성의 몸을 완전히 소거해 버렸다할지라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것은 기모노가 갖고 있는 옷감 자체에 담긴 염색이나 아름다운 자수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복은 어떨까. 직선으로 마름질한다는 점에서는 기모노와 같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드러내고자 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원피스 스타일과 더 닮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 한복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는 반드시 젊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몸매가 좋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복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여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투피스스타일이라는 점이다.
여성의 욕망을 담다
여성성을 가장 잘 드러낸 옷은 서유럽의 대표적인 드레스, 로브 아 라 프랑세즈robe a la francaise이다. 상의上衣는 프랑스어로 ‘목둘레를 파다’라는 뜻을 가진 데콜테decollete스타일이며, 목·어깨·가슴이 노출되도록 상체를 파 가슴을 강조한다. 그 위에 코르셋corset을 입어 허리를 최대한 가늘어 보이게 한다. 특히 가는 허리가 미인의 기준이 되자 코르셋의 앞 중앙이 역삼각형으로 내려와 허리를 더욱 가늘어 보이게 만든다. 하의下衣는 페티코트petticoat를 입어 엉덩이를 극대화시킨다. 급기야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은 여성의 몸매를 억압하며 허리는 더욱 가늘게, 가슴과 엉덩이는 더욱 크게 확대시키는 X자형 아우어글라스 실루엣Hourglass Silhouette을 탄생시킨다.
빅토리 앤 알버트 뮤지엄. _필자 촬영
길고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인. _출처 동아대학교박물관
한복도 처음부터 여성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엉덩이 중간까지 내려오던 저고리는 14세기 말부터 점점 짧아지더니 급기야 19세기에 들어서면서 20cm안팎으로까지 짧아졌다. 이는 유두를 가릴까 말까하는 정도의 길이다. 치마를 입는 위치도 처음에는 허리였다. 그러나 저고리길이가 짧아지면서 허리에 둘러 입던 치마는 점차 가슴위로 올라갔다. 이 때 가슴위로 올라간 치마는 가슴위에서 아무리 단단하게 조인다 해도 흘러내릴 수밖에 없는 복식구조였다. 그러다보니 가슴을 가리기 위한 하얀색의 허리띠가 새롭게 등장하고, 이는 치마와 저고리를 구분 짓는 경계선인 동시에 가슴과 허리로 시선을 모으는 새로운 장치가 되었다. 여기에 치마를 더욱 길고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면서 최고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하후상박下厚上薄’의 새로운 스타일이 18세기에 탄생되었다.
새로운 스타일을 받아들이다
조선에 하후상박이라는 패션 스타일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17세기만 해도 조선시대 여성은 집 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잘 낳아 길러야 했다.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절, 수절 등의 유교 덕목이 정책적으로 권장되고 사회활동에 제약이 따르면서 여성은 억압적이고 제한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기생들은 복식에서만큼은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았다. 여러 부인을 두는 축첩제가 허용되었던 조선사회였기에 기생들은 어떻게든 양반의 첩이 되어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에로티시즘을 극대화한 하후상박 스타일로 옷을 입어 사대부가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반가 부녀자 역시 여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하후상박 스타일의 옷을 입고 싶어 했는데, 부녀자가 새로운 스타일의 복식을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사대부였다. 실학자인 이덕무는 반가 부녀자의 복식이 기생의 복식을 닮아가는 것은 남자들이 기생의 복식을 좋아하여 그것을 부인들에게 권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에 조선 후기 사회는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특히 상공업과 예술이 발달하고 모방심리가 발현하여 복식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받아들일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기생들이 젖가슴을 다 가리지 못할 만큼 짧은 저고리와 엉덩이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되게 치마를 부풀린, 여성성과 에로티시즘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옷차림은 서민 여성들과 반가 부녀자들에게 재빨리 흡수되어 전국적인 유행으로 번져나갔다.
이처럼 한복은 서양의 드레스와 치마저고리의 실루엣만 놓고 보면 둘 다 여성성을 강조한 아우어글라스실루엣이다. 그러나 여성성을 어떻게 무엇으로 표현했느냐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다. 서유럽에서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코르셋과 페티코트이다. 이들이 처음 만들어질 때에는 단순히 허리를 가늘어 보이게 하기 위해 앞뒤에서 납작하게 끈을 달아 조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허리를 인위적으로 조이고 엉덩이를 과장하면서 코르셋과 페티코트는 나무나 고래 뼈 심지어는 철로 만들기 시작했다. 여성성 앞에서 신체의 왜곡은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치마저고리는 달랐다. 저고리는 작게 만들어 몸에 밀착시켰다. 치마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길이와 폭이 다른 속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그리고 단순히 껴입는데 그치지 않고 여성들은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해 보일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그저 단순하게 치마를 둘러 입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입는가하면, 어떤 이는 치마를 걷어 올리면서 겉자락을 가슴 쪽으로 잡아 당겨 엉덩이를 더욱 강조했다. 또 어떤 이는 걷어 올린 치마 위로 허리띠를 묶어 안정적으로 속옷이 보이도록 입었다. 이 때 치마를 걷어 올리면서 드러나는 속옷은 또 다른 여성성의 표현으로 자리매김했다.
_출처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새로운 스타일을 받아들이다
한편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만이 한복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전부는 아니다. 한복의 소박한 소재와 단순한 색상이야말로 한복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킨다. 한복의 옷감은 단순하고 기본적인 평직으로 짠다. 명주든 모시든 목면이든 원사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 직조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염색도 과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옷감을 다루는 솜씨는 남다르다. 모시는 최고의 여름직물이지만 구김이 쉽게 가기 때문에 단정한 느낌을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모시에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면 모시는 어느새 단아하면서 시원한 비단이 된다. 풀이 모시의 올 사이로 들어가 막을 형성하고 거기에 다듬이질을 하면 코팅처리를 한 듯 광택이 흐르기 때문이다. 이는 모시뿐 아니라 명주나 목면도 마찬가지다.
한복의 색상은 어떤가? 한복의 색은 소색素色이라고 하는 원사 본연의 색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 여러 차례 세탁을 하고 햇볕에 말리는 과정에서 점차 화려한 흰색이 된다. 소박한 치마저고리에 포인트를 주는 것은 붉은색의 안고름과 자주색의 겉고름, 노란색의 안고름과 분홍색의 겉고름 등의 여밈 장치이다. 이 외에도 허리띠, 주머니, 노리개 등의 장신구로 활력을 불어 넣는다. 이러한 장신구들은 소박한 의복의 색을 화사하게 하는 장점도 있지만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들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특히 노리개는 다는 위치에 따라 흔들림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 저고리에는 노리개를 고름에 끼워 단다. 고름의 주된 역할은 옷을 여미는 것이다. 고름을 한 번 묶고 그 위에 노리개를 끼우면 한 번 눌러주는 효과가 있어 고름이 풀어진다 해도 옷이 젖혀질 위험이 없을 뿐 아니라 두 가닥의 고름이 노리개와 함께 흔들리면서 절제의 아름다움이 동반된다. 치마에는 노리개를 치마허리끈에 꿰어 치마 위로 내려오도록 단다. 노리개는 걸음걸이의 속도와 보폭에 따라 흔들림이 달라진다. 이 역시 생동감을 살리고 품위와 우아함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이렇듯 한복이 단순하고 소박한 소재와 색상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옷을 입는 사람의 자태와 입은 모양, 몸을 타고 흐르는 매무새, 그리고 저마다의 창의성이 더해져 완성되었기에 최고의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비결이 아닐까싶다.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책례의冊禮儀에 나타난 의식절차와 복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