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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不老口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속이 비면 어깨가 내려앉고 등이 절로 굽는다. 뱃심 두둑해지려면 무엇보다도 진기津氣있는 밥을 먹어야 한다고 믿는 정 많은 한국인들은 기운 없이 축 처진 사람에게 ‘밥심이 최고다. 밥 굶지 말고 다니라’는 말로 위로를 건넨다.

 
 

찰기가 돌고 단맛이 나는 우리 밥

 

‘밥맛’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이다. 밥이 맛있으면 간장 한 종지, 김치 한 보시기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한 그릇을 맛나게 비워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왜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의 ‘밥맛’이 정말 좋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모두 ‘자포니카’종의 쌀을 상식한다. 쫀득쫀득하고 찰기가 도는 쌀이다. 씹다 보면 은은한 단맛이 난다. 이에 비해 동북부 지역을 뺀 중국 전역,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유럽 등에서 먹는 낱알이 길쭉하고 찰기가 없는 ‘인디카’종의 쌀은 밥 자체만으로 먹는 경우가 거의 없다. 걸쭉한 소스를 뿌려 먹거나, 다른 재료와 함께 드레싱에 버무려 샐러드로 먹는다. 그도 아니면 해물이며 고기를 넣어 볶아먹을 수밖에 없다. 푸슬푸슬 흩어지고 찰기라고는 없이 단맛도 나지 않으니 그냥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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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사람들은 밥짓기를 잘 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
밥짓는 불은 약한 것이 좋고 물은 적어야 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아무렇게나 밥을 짓는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물건을 낭비하는 결과가 된다.” 1)

 
청나라의 학자 장영張英이 그의 《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合設》에서 말했듯, 한국인의 밥짓는 솜씨는 예전부터 소문난 것이었다.
 
 

끓이고 익히고 뜸들여야
비로소 밥이 지어진다

 

이쯤에서 밥짓는 방법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벼농사는 대개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밥을 지어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정기술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간석기 정도로 들들 문질러가며 껍질을 벗겨내는 동안 쌀은 온전하게 형태를 갖추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깨지고 갈린 쌀로 할 수 있는 음식이란 기껏해야 죽, 아니면 떡의 형태였다. 처음에는 토기에 물을 붓고 끓여 죽처럼 먹었을 테지만 토기의 흙냄새와 흙가루 섞인 맛이 좋았을 턱이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시루였다. 삼국시대의 고분 벽화를 보면 꽤 많은 시루 관련 그림이 보인다. 고구려의 안악3호 고분벽화357년에는 부뚜막과 아궁이, 시루 등이 갖추어진 부엌 그림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돼지나 말 같은 동물이 걸린 고깃간이 바로 그 옆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이팝에 고기국’이라는 공식은 그때도 적용되었던 모양이다. 밥과 고깃국인지, 죽과 고기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취반炊飯은 그렇게 손쉬운 요리법이 아니다.
∙증∙소의 세 가지가 일체화一體化하여 취가 된 것이다.” 2)

 

풀어 쓰면 삶는다는 뜻의 자, 찐다는 뜻의 증, 사른다는 뜻의 소라는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한 그릇의 밥이 완성됨을 뜻한다. 물을 붓고 센 불에 끓이다가 약 불로 줄여 충분히 익히고, 마지막에 불을 끈 후 뜸을 들여 수분을 완전히 날려버리는 밥짓기의 요령이 그 안에 다 들어있는 셈이다. 물론, 이 세 가지의 단계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은 아니다. 신석기 시대에 토기에서 삶아 먹기 시작하다가 삼국시대에 시루를 만들어 쪄먹고, 마지막으로 철기로 만든 솥에서 제대로 뜸들여가며 먹게 되었으니 단 두 줄의 글 속에는 수천 년에 걸친 밥짓기의 역사가 숨어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밥맛으로써 무슨 불에 지은 것인지를 알아맞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소나무∙참나무∙밤나무 등의 나무 종류를 알아내기는 예사이고
그 나무가 장작인지 아니면 일단 목재木材로 사용했던 것인지조차
쉽게 알아맞히었다고 한다.
加熱法이 밥맛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3)

 
이렇게 입맛 까다로운 중국인들이 인정했던 한국인의 밥맛. 자부심을 느껴도 좋지 않을까? 재미있는 것은 한국인의 밥짓는 솜씨는 지금도 여전히 중국인들에게 매력적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을 찾는 중국인들의 쇼핑 목록에서 한국의 전기 압력밥솥이 수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 중국인의 입맛과 쌀의 특징에 맞춘 기능을 탑재한 전기압력밥솥의 수출도 활발하다는데 올해는 중국 최대명절인 춘절 연휴를 맞아 중국인들을 겨냥한 ‘춘절맞이 특별 프로모션’까지 진행될 정도라고 한다. 밥뿐만 아니라 죽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입맛에 딱 맞춘 죽 제조 기능까지 덧붙였다니 정말 안 사고는 못 배길 쇼핑목록이 됨직하다.

 
 

조리법, 시대, 쓰임을 초월하는 우리 죽

 

죽 맛 내는 솜씨 역시 한국인을 따라올 민족도 드물 것이다. 곡물을 곱게 갈아서 전분을 가라앉혀 가루로 말렸다가 녹말을 물에 풀어 곱게 끓인 응이, 쌀알을 그대로 끓이는 옹근죽, 쌀알을 반 정도 갈아서 만드는 원미죽, 완전히 곱게 갈아서 쑤는 무리죽 등 조리법도 다양하다. 여기에 육해공군 재료를 대입시킨다면 알파고가 바둑 대국을 앞두고 내놓는 경우의 수 못지않은 조합이 가능한 것이 우리의 ‘죽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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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요록要錄》 등 조선 시대 요리서에서도 다채롭게 소개되고 있는 죽은 주식의 대용은 물론, 환자의 보양식이나 치료식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최근에는 아침식사, 다이어트, 디저트의 역할을 담당하는 죽까지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심지어는 샐러드의 드레싱이나 소스의 역할을 하는 죽도 있다. 묽게 끓인 잣죽을 새우나 닭가슴살을 곁들인 샐러드에 얹어 먹어보면 왜 죽이 훌륭한 소스가 될 수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맛있게 잘 먹되, 많이 먹는 것을 경계하는 요즘의 식트렌드에 가장 적합한 음식이 바로 죽이 아닐까? 가끔은 옛 고조리서를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깜짝 놀랄만한 다이어트식이나 미용식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 글의 필자는 1985년 교문사에서 발행한 《한국요리문화사》를 참고로 하고 있다. 《한국요리문화사》는 우리나라 식품 분야의 저명한 연구가인 故이성우 선생이 집필한 책으로, 농업과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지를 보여준다. 요리와 조리, 가열요리의 기원, 밥의 문화, 국의 문화, 곰탕과 설렁탕의 문화, 국수와 냉면의 문화 등 한식의 전 범위를 담아내고 있다.
 
《한국요리문화사》, 이성우 지음, 교문사
 1) 밥의 문화: 우리나라의 밥짓기 중에서 _66쪽
 2) 밥의 문화: 밥짓기의 내력 중에서 _65쪽
 3) 밥의 문화: 밥짓기의 내력 중에서 _65쪽
 
글_ 이명아 |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객원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전통예술대학원을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객원교수로 있다. 전통 식문화와 한국의 농식품에 관한 글을 쓰는 매거진 에디터 출신의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요리 연구가로 향토 음식에 바탕을 둔 외식 메뉴 개발과 농식품 마케팅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림_ 신예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여행과 음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 〈여행자의 밥 1, 2〉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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