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품

양조장으로 간 항아리

글 김승유(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

양조장 술 항아리

집집마다 있던 술 항아리
일반적으로 항아리라고 하면 가장 먼저 ‘장독’이나 ‘김칫독’을 떠올린다. 곡식이나 물을 보관하기도 했지만, 김치나 간장·고추장·된장 등을 담그고 익히는 데 널리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아리를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음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술’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술 항아리는 집집마다 흔히 쓰던 생활 용기였다. 당시 술은 지금처럼 사서 마시는 것보다 집에서 직접 빚는 일이 훨씬 일상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술은 대부분 가양주家釀酒의 형태로 전승되었고, 농사와 제사, 손님 접대, 세시풍속 등 생활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용하는 곡물과 누룩, 물, 발효 환경이 지역과 집안마다 달랐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술이라도 만드는 방법과 맛은 제각각이었다.
집집마다 술을 빚고 술 항아리를 두던 풍경은 20세기에 들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제는 술을 주요 과세 대상으로 주목했고, 1909년 주세법과 1916년 주세령을 시행하면서 술을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이 시기부터 술을 빚으려면 주조 면허가 필요해졌고, 일정한 생산 규모를 갖추지 못하면 면허를 받기 어려워졌다. 자가용주自家用酒에는 더 높은 세율이 부과되었고, 누룩 제조 역시 통제되면서 가양주 문화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변화는 술에만 그치지 않았다. 집에서 술을 빚는 일이 줄어들자 술을 익히던 항아리도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술을 만드는 공간과 방식이 달라지면서 술 항아리의 자리와 쓰임도 함께 달라진 것이다.

양조장으로 간 술 항아리
집에서 술 항아리가 점차 자취를 감추는 동안, 술 항아리는 새로운 공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바로 양조장釀造場이다. 양조장은 여러 가정에서 제각각 빚던 술을 대신해 일정한 장소에서 술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상업적 생산 공간이다. 주세령을 도입한 세무당국 입장에서 양조장은 술을 만드는 사람과 장소, 생산량을 파악하고 세금을 부과하기에 훨씬 관리하기 쉬운 곳이었다. 1934년을 기점으로 자가용 면허가 완전히 폐지되고, 판매용주販賣用酒만이 합법적인 술로 인정받게 되면서 양조장 중심의 술 생산 체계가 더욱 확고해졌다.

괴산 제일양조장 발효실 술 항아리(2018~2019년 현지 조사 당시 촬영)

이러한 변화는 술 항아리의 모습과 쓰임도 바꾸었다. 집에서 가족이 먹을 만큼 술을 빚을 때와는 달리 양조장에서는 많은 양의 술을 지속적으로 생산해야 했다. 자연히 술 항아리도 커졌고, 여러 개의 항아리를 한꺼번에 사용했다.
양조장의 술 항아리는 술을 발효하고 저장하는 용기이면서 생산량을 확인하고 관리하는 기준이 되었다. 항아리는 용량을 측정하는 검정檢定의 대상이 됐고, 용도와 번호, 용량, 검정 일자 등이 항아리 겉면에 함께 기록되었다. 이 검정은 임의로 생략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필수적인 절차였다. 이처럼 양조장 술 항아리는 하나의 생산 설비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게다가 가정용 항아리와 달리 300~1,000리터 정도에 이를 만큼 컸고, 제작할 수 있는 장인이 많지 않은 데다 가격도 비싸 쉽게 교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금이 가거나 일부가 깨져도 버리기보다 수리해 계속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가 2018~2019년에 현지 조사를 했을 당시, 양조장에서는 이를 ‘깁는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일부 양조장에 보관 중인 술 항아리 중에는 여러 차례 덧대고 수리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수리하여 사용한 술 항아리

달라서 특별한 술 항아리
국립민속박물관에는 양조장 술 항아리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모습을 지닌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항아리(민속47225)는 전남 곡성군 삼기면 일대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로 ‘酒造用’, ‘大正十三年 ○月 ○日 檢定’, ‘容量 參斗五升’ 등의 글씨와 숫자가 새겨져 있다. 1924년에 주조용 용기로 검정을 받았고, 용량은 3말 5되(약 63리터) 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항아리는 일반적인 양조장 술 항아리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작다. 현지 조사한 양조장의 술 항아리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가정에서 사용하던 항아리 크기에 가깝고,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생활용 항아리들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작은 항아리가 왜 ‘주조용’으로 검정 받았을까? 현재 남아 있는 정보만으로는 이 항아리의 정확한 이력을 알기 어렵다. 다만, 1924년이라는 시점으로 짐작해 보면, 자가용주를 빚기 위한 술 항아리로 검정 받았을 가능성도 있고, 일반적인 생활용 항아리를 양조장에서 주조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담금용이나 제성용이 아닌 밑술[酒母]용 항아리일 가능성도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표면에 남아 있는 눈금이다. 현지 조사한 양조장에서도 항아리 겉면에 이처럼 용량을 나타내는 눈금을 표시한 사례는 흔히 볼 수 없었다. 얼핏 보면 이 눈금으로 항아리 안의 술의 양을 바로 확인했을 것 같지만, 실제 계량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항아리는 위아래의 폭이 일정하지 않고 형태도 제각각이어서 같은 간격의 눈금이라도 실제 용량은 같지 않다. 그래서 대개는 항아리마다 자를 이용해 깊이에 따른 용량을 측정하는 수측水測 검정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용기검정부’에 기록해 술의 양을 계산했다.
소장품 항아리가 주조용 용기로 검정 받은 1924년은 주세령 시행 이후 술 생산에 대한 관리가 강화되고, 가양주 중심의 술 문화가 양조장 중심의 생산 체계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크기는 생활용 항아리에 가깝지만, 표면에는 ‘주조용’이라는 용도와 용량, 검정 일자, 눈금이 함께 남아 있다. 이처럼 항아리의 크기와 표시 방식이 아직 일정한 형태로 정리되지 않은 모습은 새로운 술 생산과 관리 체계가 자리 잡아가던 과도기의 한 장면을 보여 준다.

소장품 술 항아리(민속47225)

술 항아리에 남은 우리 술 문화의 변화
술 항아리에 용량과 검정 일자가 새겨진 것은 얼핏 사소한 변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술을 만드는 사람과 장소, 생산량을 확인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작지 않다. 집집마다 제각각 빚던 술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측정되고 기록되는 생산품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양조장 중심의 생산 체계가 자리 잡으면서 술을 관리하는 방식도 점차 달라졌다. 주세법 도입 이후 초창기에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생산량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해방 이후에는 안정적인 주세 확보를 위해 일정한 품질의 술을 꾸준히 생산하는 것까지 중요해졌다. 세무당국을 중심으로 주조 기술을 보급하고 품평회를 열거나 원료를 관리한 것도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양조장마다 특색을 갖춘 술보다 실패 없이 생산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술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맛을 판단하는 기준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막걸리에서 떠올리는 ‘달고 부드러우며 마시기 편한 맛’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전통적인 맛이라기보다, 주조 기술과 원료, 생산과 유통 환경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점차 익숙해진 맛에 가깝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막걸리다운 맛’에도 근현대 술 문화가 지나온 시간이 쌓여 있는 셈이다.
물론 우리 술 문화가 한 방향으로만 흘러온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지역의 재료와 전통 누룩, 서로 다른 제조법을 내세운 막걸리가 다시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술 항아리에 남은 숫자와 글씨는 단순한 검정의 표시가 아니다. 집집마다 빚던 술이 관리와 생산의 대상이 되고, 그 과정에서 술을 만들고 맛보는 방식까지 달라져 온 시간을 함께 담고 있다.

민속소식 제317호  (2026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