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26년생입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보니 항상 한국이 가장 흥미로운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으며 캐나다인이자 영국인이죠. 저는 캐나다와 영국의 이중 국적자이지만, 항상 한국이야말로 제 진짜 집이라고 생각해 왔고, 한국을 사랑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잠시 머물 때마다 행복하며 좀 더 머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네요.”
세브란스 베이비, 아일린 여사와 가족들
‘세브란스 베이비(Severance Baby)’라는 명칭은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는 아일린 커리어(Eileen Currier) 여사의 삶과 관련이 있다. 아일린 여사는 1926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에 살았던 많은 외국인 2, 3세들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나 일종의 동문 의식을 공유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아일린 여사가 한국에서 태어난 배경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아서(Arthur)는 미국의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의 한국 지사에서 근무했으며, 어머니 캐슬린(Kathleen)은 한국에서 음악 교사로 활동했다. 이 두 사람은 서울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만나 결혼하고 서울에 살면서 패트리샤(Patricia)와 아일린(Eileen) 두 딸을 낳고 길렀다.
패트리샤와 아일린 자매는 유년 시절 서울외국인학교(SFS)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캐슬린은 피아노를 가르치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하지만 1940년 일본의 적대적인 외국인 정책 때문에 캐슬린과 아일린 여사는 캐나다로 이주했고, 오랫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 사이 영국에 거주하던 아일린 여사는 가족이 수집한 사진과 기록, 한국식 가구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2023년, 아일린 여사와 가족들은 영국과 한국의 관계자들에게 기증 의사를 전달하였고, 그 결과 국립민속박물관은 아일린 여사의 소장 자료를 기증받아 정리하고 이번 자료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100년 전 고먼 가족의 삶 속으로
아카이브 자료집 『세브란스 베이비, 아일린 고먼: 100년 전 고먼 가족의 서울살이』는 아일린 여사가 기증한 사진과 기록물, 실물 자료 등 281점과 아일린 여사의 인터뷰, 가족들의 회고록을 활용하여 다섯 개의 장과 세 편의 글로 구성되었다. 1장은 아서와 캐슬린의 만남부터 아서의 장례식까지의 자료를 소개한다. 고먼(Gorman) 부부가 처음 만났던 파티, 약혼식과 혼인신고서,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었던 고먼 가족의 집, 함께 일하던 한국인 고용인들, 아서의 장례식 장면을 찍은 사진과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2장에서는 고먼 가족과 함께했던 다양한 외국인 커뮤니티의 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가장무도회, 연극, 음악회, 만찬 등 이제껏 쉽게 접하지 못하였던 외국인들의 특별한 행사를 소개하며, 사진 곳곳에서 고먼 가족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더해진다. 3장에서는 고먼 가족이 한국 곳곳을 다니며 만났던 한국인들의 일상과 풍경 사진, 외국인 별장 단지에서 찍은 사진, 금강산 여행 엽서를 만나볼 수 있다.
4장은 패트리샤와 아일린의 학창시절, 캐슬린의 음악 교사 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담고 있다. 5장은 1940년 한국을 떠나야 했던 고먼 가족의 이야기를 사진과 자료로 풀어냈다. 캐나다로 이주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한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놓지 않았던 캐슬린과 아일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자료집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도 제공한다. 책을 펼치면 마치 소설의 등장인물을 소개하듯, 고먼 가족 네 사람을 소개하는 페이지와 가족의 생애사를 정리한 연표를 볼 수 있다. 또한 고먼 가족의 집과 그 주변을 표기한 지도, 가족의 여정, 패트리샤의 회고록 ‘가맙삽니다(KAMAPSAMNEDA)’ 전문을 실은 별지를 수록하여 읽는 재미를 더하였다. 마지막으로 기증 과정을 소개한 글, 서울의 외국인 거주 지역과 외국인 사회 및 전쟁 경험을 설명한 글, 캐슬린의 한국 생활 회고록인 ‘다채로운 나라, 한국’을 분석한 글 세 편을 수록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100년 전 고먼 가족이 보낸 일상의 의미
이번 자료집을 준비하면서 민속아카이브팀은 일제강점기 외국인들의 일상을 조명하는 작업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고자 하였다. 그간 외국인들의 전반적인 삶, 직업이라던가 생활 양식은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기증 자료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서울에서 일제강점기를 보냈던 외국인들의 삶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일린 여사의 수집 자료와 이번 자료집의 발간은 생활사 박물관인 국립민속박물관이 수집, 보존, 전시, 연구하는 생활문화의 한 부분을 새롭게 채워 넣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책 발간은 길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준비 과정에서 만났던 고먼 가족의 일상은 이러한 어려움을 잊게 해주는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책을 준비하던 지난 4월, 숙환으로 아일린 여사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금 더 일찍 완성하여 전달해 드렸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이번 자료집 발간을 계기로 마지막까지 한국을 사랑했던 아일린 여사의 기증 자료가 많은 사람에게 소개되고 활용되기를 바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는 열두 고개
청천 하늘에 별도 많다
우리 집 살림살이 열두 고개
제 침실 뒤편에 있는 산에서 그 노래를 자주 들었어요.
항상 누군가가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고
덕분에 저도 아리랑을 알게 되었답니다.”
글 | 이승재_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