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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소장한

예서禮書에도 보이지 않는 독특한 형태의 상여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

공달空月이라고 하는 윤달閏月이 3년만에 돌아왔다윤2월, 양력 3월 22일~4월 19일. 속담에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 놓아도 아무 탈이 없다.”라고 할 만큼, 윤달을 무탈한 달로 여겨, 조상의 묘소를 이장移葬하거나, 석물을 새로 세우는 등 묘소 정비를 많이 한다. 지금이야 상례의 간소화로 상여가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초상初喪뿐만 아니라, 이장에도 상여를 이용하였다. 그래서 윤달이 들면 이장을 하느라 마을마다 상여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실3에서는 한국인의 일생을 마무리하듯,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가 전시되어 있다. 이 상여는 1994년에 진주화단친목회에서 기증한 유물로, 1856년철종 7에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의 최필주崔必周, 1796~1856의 장례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최동한崔東漢이 경상남도 통영에 거주하는 조각공 등을 초청하여 300냥을 주고 6개월 동안 제작하였다고 한다. 고령댁에서 사용한 후 개인 상여로 보관해오던 중, 1933년에 진주화단친목회에서 이 상여를 정조正租 15섬을 주고 구입하여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1982년에는 진주 개천예술제 행사의 하나인 「경남상여경연대회」 및 MBC문화방송 「레이다 11」의 ‘묘지 : 전국토가 묘지로 – 묘지강산 만들 것인가’라는 방송에 이 상여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화단친목회 회원이 줄어들고, 또 상례의 간소화로 꽃상여가 등장함에 따라 더이상 상여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상여 훼손의 심각성이 드러나자, 화단친목회에서 역사가 있는 상여의 보존을 위해 1994년 11월 25일에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기증 당시에는 분해되지 않은 3층과 4층의 형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대부분 부속품 등이 해체되어 원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고, 용이나 봉황 등은 일부 목이 부러지거나 앙장 등은 낡아서 더이상 사용할 수 없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부러진 부분이나 부속품 등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서 상여의 조립은 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박물관에서는 이 상여의 조사연구와 더불어 김재환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4호 상여장에게 상여 수리 및 조립을 의뢰하였고, 1996년에는 상여의 제작 연대가 정확할 뿐만 아니라, 예서에서 제시하는 상여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으며, 당시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의 저승관을 잘 보여주는 다양한 조각품과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민속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민속자료 제230호현재는 국가민속문화재로 변경로 지정되었고, 고령댁古靈宅에서 소장한 상여라고 하여 현재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라고 불리고 있다. 그 당시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상여로는 ‘남은들 상여중요민속자료 31호’와 ‘청풍부원군 상여중요민속자료 120호’가 있었다. 이 두 상여가 국가에서 하사한 단층의 가마형인데, 고령댁 상여는 각종 예서 및 현존하는 상여의 형태와도 다른 4층 누각의 기와집 형태라는 점에 주목을 받았다.

상여는 원래 중국에서 사람 또는 소, 말이 끌던 수레柳車였는데 조선시대에 주자의 『가례家禮』를 수용하면서 사람이 어깨에 메는 가마 형태로 바뀌었다. 『가례도』에 나와 있는 상여는 대여大轝라고 하여, 장강長杠을 중심으로 하는 기본 틀과 관을 싣는 소방상小方牀, 그리고 관을 덮는 죽격竹格으로 나누어져 조립하도록 되어있는데, 장식이라고는 죽격의 사방 모서리에 유소流蘇만을 다는 것뿐이었다. 반면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왕의 대여는 죽격 대신에 유개帷蓋 형태로 하되, 사방 모서리에 용의 머리와 유소를 장식하였고, 대부大夫, 사, 서인庶人은 봉황의 머리와 유소를 장식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민간에서 사용하는 『사례편람』 소여小轝는 대여의 기본 틀을 유지하나 소방상이 없이 죽격 대신에 유개를 사용하여 관을 덮으며, 상여 앞뒤로 정자형丁字形의 막대 좌우로 초롱을 매어달고 그 위에 앙장仰帳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대여와 소여를 절충한 것이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의 『읍혈록泣血錄』에 나와 있는 방상도方山圖이다. 즉 유개의 꼭대기에 연봉은 물론 사각 모서리에는 봉황 머리와 유소, 정자형 좌우에는 용머리와 초롱이 장식되어 있다. 20세기 초반의 김준근의 기산풍속도 상여행렬에도 이와 유사한 상여가 보인다.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도 앞서 예서에 나오는 대여와 같이 앞뒤로 정자형으로 청룡과 황룡을 조각하여 세우고, 1층과 2층 사각 모퉁이에는 봉황을 조각하였지만, 궁궐의 월대에서나 볼 수 있는 2층 기단에다, 궁궐이나 사찰의 중요한 건물에만 쓰이는 다포 형태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 관을 감싸는 상여의 1층은 사방을 검은색 휘장으로 두르고, 밖에는 적색, 황색, 녹색의 삼색을 둘렀으며, 그 위에 가마발처럼 장식을 하였다. 그리고 단을 구성하는 1층과 2층의 난간欄干에는 망자를 모시듯이 시립용 나무인형木人이 장식되어 있다. 3층에는 망자를 호위하듯이 신인神人이 타고 있는 12지상을 장식하였는데 앞뒤로 용과 뱀이, 좌우로 양-원숭이-닭-개-돼지, 쥐-소-호랑이-토끼-말이 순서대로 위치되어 있다. 그리고 지붕 모퉁이와 추녀마루 끝에는 이승과 저승을 오고 간다는 새가 조각되어 있고 지붕에는 앞뒤로 악귀를 물리치듯이 칼을 들고 있는 희광이가 조각되어 있다. 일종의 상여 뚜껑인 4층은 다포 형태의 팔작지붕으로 공포 사이에는 죽음을 상징하듯 시들어가는 연꽃이 순차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용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도 여러 마리의 새가 조각되어 있는 등 망자를 저승까지 인도하거나 수호하는 각종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용의 턱, 봉황의 부리, 새 부리 등에는 다양한 크기의 유소를 늘어뜨려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리고 4층 위에는 상여 몸체를 가리는 앙장仰帳이 있다.

이처럼 고령댁 상여도 예서에 나오는 대여와 소여의 절충형으로 추정된다. 즉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정암집貞菴集』에 “국가에서 만들어 보낸 상여가 대부분 화려하지 않기 때문에 예장을 치르는 집에서는 그 비용을 직접 받아서 상가喪家에서 상여를 화려하게 만든다.”라고 한 것처럼, 대략 대여에 준하여 『사례편람』에 나오는 소여小轝 구조를 절충하되, 유개 대신에 4층 누각의 기와집 형태로 하고, 망자를 수호하거나 망자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연꽃, 잉어, 모란, 신선, 불로초, 소나무, 동자, 학 등을 그리거나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상여는 조선 초기에 신분에 따라 대여, 소여 등으로 크기나 장식 등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여를 망자가 타는 마지막 가마이고, 자식들은 상여에 태워 보내는 것을 마지막 효도라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크고 화려한 상여를 허용하였다.

경상도의 상례 문화를 보여주는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는 1994년에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기증된 이후로 1996년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됨에 따라 국립민속박물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이 되었다. 이 상여는 1996년 『개관 50돌 국립민속박물관 50년』, 2002년 『코리아 스케치–파란 눈에 비친 100년 전의 한국』 특별전에서 선을 보였다. 이때 상여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한 번 이동할 때면 박물관의 장정들이 총출동해야 했고, 일반 통로로는 나갈 수 없어서 지하 램프에서 현관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박물관 앞뜰에서 빈상여놀이가 자연스럽게 진행되기도 했다. 2006년에 제3전시관을 개편하면서부터 상여를 움직이는 것이 여의치 않아서 처음으로 야외에서 앙장1) 까지 설치하여 상여를 촬영하였는데, 이 지면에 실린 두장의 상여 사진은 지금까지 대표 사진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이 상여는 한국인의 일생을 마무리하는 상례문화의 정수로서 제3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1) 먼지 등을 막기 위해 상여나 제상 위에 치는 천막


글 | 최순권_어린이박물관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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