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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는 #2

영산강 350리, 물길 따라 펼쳐진 주민들의 삶

국립민속박물관은 2018년부터 ‘역사민속생활문화조사’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그 결과 2018년 ‘한강수로와 어로문화’, 2019년 ‘금강수로와 강변마을의 식문화’, 2020년 ‘낙동강 수로와 수몰이주민’ 주제로 민속조사 후, 보고서를 발간했다. 2021년에는 ‘영산강의 포구와 장시’라는 주제로 민속조사를 했고, 올해 8월 관련 보고서가 발간될 예정이다. 조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장날이 겹치는 곳도 있었고, 조사 시기 중 코로나19가 절정에 이르기도 했다. 이런 탓에 현지의 상인들은 물건은 사지 않고 이것저것 묻는 조사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생업의 귀중한 시간을 조사자에게 시간을 내 줄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상인은 면담에 협조적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적극적으로 면담에 응해주신 나주 김춘식 소목장과 사진관을 운영하는 독천 최순봉 어른의 내용을 담지 못해서, 송구스러울 뿐이다. 두 분께 지면을 빌려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농촌 정기시장의 모습
이번 조사는 포구와 장시場市라는 조금 생소한 주제로 접근했다. 과거 뱃길이 나주 영산포에 이르렀던 것을 고려하여, 나주 영산포, 나주 남평, 무안 일로, 영암 독천 등 영산강의 중류와 하류 지역을 조사지로 선정했다. 우선 상인들이 어디에 살고, 시장을 어디까지 순회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상인들은 대개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내외의 시장을 순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까지는 상인들의 상품을 옮겨주는 ‘장차’가 존재했다. 그 이후에는 상인들이 직접 트럭을 운행하거나, 도매상들이 이른 아침 오일장 상인들에게 물건을 배달하면서 이러한 장차 문화는 사라졌다. 양철지붕으로 된 장옥과 천막을 치고 장사하며, 자리싸움을 하던 상인들의 모습은 모두 과거의 풍경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대부분의 상인들이 전기시설과 하수시설을 갖춘 현대화된 장옥 안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인들은 추첨을 통해 각자 10평 내외의 자리를 배정받으며, 장옥세는 한 달에 5,000원 내외이다. 하지만 이를 마다하는 상인들도 있다. 노점상들은 목 좋은 곳에서 장사해야 매출이 오른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장옥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농촌 정기시장

조사한 농촌 정기시장의 특징
이번 조사에서는 영산포 시장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농촌 정기시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첫 번째 전남 나주 지역 정기시장을 보자. 영산포는 과거 어시장이 발달한 곳이다. 이곳은 뱃길과 기찻길, 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이었으며, 한때 전남 지역의 교통 요충지로 사람과 물산이 모여드는 중요한 곳이었다. 1970년대까지 소금배와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나, 뱃길이 끊긴 후 영산포 시장은 장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인근 지역에서 가장 큰 정기시장 중 하나이다. 남평 시장은 광주와 나주, 화순 경계에 위치하며, 나주 시장, 영산포 시장과 함께 나주를 대표하는 오일장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인구감소와 시장의 위치 변화로 인해, 장세가 많이 위축되었다. 두 번째, 전남 무안 지역의 일로 시장은 시대별로 위치가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 시장 이름에도 변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남창장, 일제강점기 삼향장, 오늘날 일로장으로 시장 이름이 바뀐 것을 확인했다는 것은 이번 조사의 큰 소득이다. 또한, 시장의 위치 변화에는 기차역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원래 이곳은 과거에 ‘품바’라고도 불리는 각설이들이 활동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품바는 각설이가 장타령을 부를 때 쓰는 추임새이다. 1980년대 김시라의 창작극 ‘품바’가 성행하면서, 품바라는 명칭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전남 영암의 독천 시장은 한때 바다와 인접하여, 가까운 갯벌에서 생산된 수산물이 거래되었던 곳이다. 독천 시장 인근 마을 사람들은 갯벌에서 낙지를 잡아 팔아 생계를 이어갔는데, 대나무에 낙지를 12마리씩 꿰어서 팔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낙지볶음’과 ‘갈낙탕’이 유명하다. 위에 열거한 정기시장 대부분은 명절 대목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과거와 같이 사람이 북적거리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오후 3시가 되면 장을 마감하고, 상인들은 자리를 떠난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영산포 시장과 일로 시장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시장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다. 공공근로 인력을 배치해, 구입한 물건을 버스정류장이나 주차장까지 옮겨주거나, 시설을 현대화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지리적 변화가 뚜렷한 강
영산강 유역에서의 간척 사업은 세대에 걸쳐 영산강의 지리적 경관을 변화시켰다. 19세기 말 일본인들이 농경지 확보 및 수탈의 목적으로 간척하였고, 현재 일로읍의 자방포들과 영화농장이 그 과정에서 탄생한 곳이다. 이 두 곳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드나들던 저습지이다. 1981년 하구언 河口堰[강 입구에 세운 댐] 건설은 영산강 주민들의 생활 터전과 양식을 변화시켰다. 원래 영산강은 나주까지 바닷물이 도달하고, 영산강 하류목포-몽탄대교에는 ‘남해만南海灣’이라는 바다가 존재했는데, 영산강 하구언의 완공으로 남해만은 간척되고 농경지가 되었다.

 

포구와 나루터의 흔적은?
오늘날 영산강의 포구와 나루터 흔적은 2008년 4대강 정비 사업으로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이미 1970년대에 나룻배 운영이 드물었고, 이를 운영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작고한 상태이다. 1978년 영산강 하구언의 건설이 시작되면서는 목포에서 영산포까지의 뱃길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육로 발달로 인해 포구와 나루터의 효용성도 사라졌다. 현재 영산강의 양안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는 곳이 과거 나루터가 있던 곳이라고 추정된다. 영산포의 선창거리라는 지명을 통해서 과거 이곳에 많은 배가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증명하듯 지역주민들은 강 수위 측정소를 등대로 인식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우리는 나주시 구진포에서 1970년대 나룻배를 운영했던 제보자를 만날 수 있었다. 나룻배는 나주 구진포와 진포리를 연결했다고 한다. 뱃삯은 이백 원 정도 했으며, 정해진 도강 시간은 없었고, 나룻배에 10여 명이 탈 수 있었으나, 대개 5~6명을 태우면 강을 건넜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주민들은 영산강과 바다가 다시 만나기를 염원한다.
하구언의 건설로 인한 변화는 뚜렷하다. 어선들이 바다와 강 하류에서 조업하고, 현재 영산강 하류와 중류까지 올 수 있었으나, 바닷길이 막히고, 다리들이 건설되면서, 포구 및 나루터, 어시장이 소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영산포이다. 조사 과정에서 만난 영산강 일대 주민들은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원활히 소통하기를 희망했다. 강 흐름과 뱃길의 단절로 인해, 영산강 주변 지역이 쇠퇴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이곳 농촌 정기시장의 쇠락과 주민 생업 변화와도 관련이 깊다. 영산강이 민물로 변해버린 탓에, 반농반어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들은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거나 도회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어부들은 과거와 같이 다양한 물고기를 잡기 힘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영산강의 지리적 변화와 주민들의 변화된 생활상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영산강이 민물로 변화하면서, 반농반어로 이어가던 생업이 농업이나 상업으로 변화되었고, 이에 따른 농촌 정기시장의 변모 양상이 뚜렷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8월에 발간하는 보고서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글 | 윤경식_민속연구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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