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공기놀이는 있다
공기놀이는 여러 나라와 문화권에서 고루 볼 수 있다. 소재 또한 그 문화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을 가져와 사용했다. 우리나라 공기놀이도 돌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해 도서 지역같이 바다가 가까운 곳은 고동 껍질, 소라껍데기, 꼬막 따위를 가지고 놀았고 콩을 가지고도 했다. 이 밖에 살구씨 같은 열매의 씨앗을 쓰거나 몽골 같은 경우는 동물의 뼈를 가지고도 놀았는데 부산에서 공기놀이를 일컫는 다른 이름이 ‘살구’인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논흙을 동그랗게 만들어 하루 정도 말려서 쓰기도 했다. 안동에서는 공기놀이를 ‘자새’ 또는 ‘짜개’라고 하는데 윷을 가지고 공기놀이처럼 하는 ‘짜개 윷’이란 것도 있었다. 이렇듯 소재는 조금씩 다르지만 매우 공통으로 일치하는 것이 있다. 다섯 개를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아이들은 어느 나라나 네 개도 아니고 여섯 개도 아닌 꼭 돌 다섯 개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는 것일까. 이리저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공기놀이하는 아이들 손가락이 모두 다섯이라는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는 정도이다.
몰입은 단순함에서
공기놀이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떠오른다.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몰입하는 동네 누나들의 모습이다. 누가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지금 생각하면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누나들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에게 혼이 빠져나가면 저렇게 되나 싶을 정도로 소복이 둘러앉아 공기놀이에 몰두하는 모습을 돌이켜보니 명상도 그런 명상이 없었다. 정신없이 놀다가 저녁 찬거리 심부름을 시키려는 엄마 목소리도 못 듣고, 끝내 뛰쳐나온 엄마 손에 끌려가는 누나도 있었다. 그렇게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아이들은 공기놀이에 빠져 있었다. 끌려가면서도 공깃돌에 눈을 떼지 못하던 눈빛이 지금도 선연히 떠오른다. 손은 또 어떤가. 하도 땅을 쓸어 땅바닥에 닿는 손날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하! 우리는 이렇게 놀았다. 이렇게 몰입하던 힘으로 오늘을 산다. 놀면서 수도 없이 지고 이기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무언가에 막히고 좌절했을 때, 아이들은 어떻게 그 경계를 결론지을 수 있을까. 오로지 놀이만이 죽고 살아나는 죽음과 부활을 되풀이 경험하며 세상을 살아갈 회복력을 기른다.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게임’과 결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죽고 살아나고 다시 죽고 살아나서 놀이이다.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 놀이가 놀이가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떤 놀이든지 놀이가 몸에 푹 익기 전까지는 놀이에서 숱하게 지고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자꾸 해보고 부딪히다 보면 언젠가는 이기기도 하고 솜씨도 조금씩 나아진다. 놀이는 이런 과정과 경험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이처럼 놀면서 몸으로 익힌 용기와 긍정적인 힘은 놀이 바깥 세계에서도 살아 움직인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꿈을 찾아가는 희망도 놀이하면서 가늠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잘 안 되지만 자꾸 하다 보면 공기놀이의 솜씨가 하나씩 늘어나는 경험, 이것이 놀이의 가치이다. 놀이는 모름지기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며, 하면서 즐거워야 한다. 그런데 가만두면 재미있을 것도 성인이 시켜서 하는 것이 되니 놀이도 놀이가 아니게 되어가는 노릇이다. 그런데 아이들 사이에서 시키지 않아도 가르치지 않아도 줄기차게 이어져 오는 놀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공기놀이이다. 나는 궁금하다. 어떻게 그 많은 놀이가 아이들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공기놀이는 지금껏 생명을 이어올 수 있었을까.
공기놀이의 생명력
공기놀이에 무엇이 있어 끊이지 않는 생명력을 지금껏 이어올 수 있었을까. 그것을 알뜰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찾은 생각들 속에서 다른 여러 가지 놀이 또한 어떻게 아이들과 만나고 나누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공기놀이를 찾아 우리나라와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 아이들이 이나마 공기놀이를 하는 까닭은 공기놀이가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 좁아도 되니 어디서든지 할 수 있고, 시간이 적어도 되니 쉬는 시간에도 잠깐씩 할 수 있다. 실내에서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앞선 세대의 공기놀이를 따라가지는 못한다. 전해오는 수많은 공기놀이1) 가운데 아주 단순한 공기놀이만 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나에서 네 알까지 늘려가며 던지고 받다가 꺾기로 끝나는 공기놀이만이 명맥 정도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다른 다양한 종류의 공기놀이는 많은 아이가 잘 모르고 있다. 아이들이 쓸 수 있는 짧은 자투리 시간으로는 그런 공기놀이를 익힐 수 없기 때문이다. 공기놀이는 아이들의 머리와 마음과 손과 동무와 세계가 함께 어울리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기놀이는 많은 교구와 장난감 놀이처럼 사람과 사물의 단순한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공깃돌 다섯 알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놀이이다. 공기놀이하면서 아이들끼리 어울려 노는 모습은 복잡한 놀잇감을 가지고 홀로 노는 모습보다 그래서 아름답다. 아이들은 손과 발을 써서 마음과 바깥 세계를 잇는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손과 발은 세계와 만나는 길이다. 이런 까닭으로 손을 쓰는 놀이는 아이들의 마음과 정신, 육체와 세계를 일깨우는데 중요한 놀이가 아닐 수 없다.
공기놀이의 놀잇감은 퍽 단순하다. 이처럼 놀잇감은 단순할수록 좋다. 아이들이 놀면서 채울 부분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돌 다섯 개만 있으면 충분하다. 단순한 놀잇감이지만 이 공깃돌을 가지고 하는 솜씨는 끝없이 다채롭게 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은 공기놀이하면서 섬세하게 근육을 쓸 수 있게 되며 고도로 집중된 몰입과 끈기를 자연스럽게 만난다.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아이들이 복잡한 장난감을 더 좋아하리라 생각하고 그런 종류의 장난감을 더 자주 사주는데 이것은 생각해볼 일이다. 당장은 장난감의 색깔이나 소리에 아이들이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이러한 호기심은 이내 사그라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장난감들을 뜯어보면 그 속이 매우 복잡하지만 놀다 보면 쓰임이 단조롭다는 것을 곧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은 돌멩이 다섯 개로 하는 공기놀이나 한 가닥 실로 하는 실뜨기를 오래도록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공기놀이나 실뜨기가 지닌 놀이의 열린 성격 때문이다. 이런 놀이는 한 가지 놀이 방법에만 머물거나 갇히지 않고 놀이하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다른 방식과 모양의 놀이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동네마다 다른 공기놀이와 수많은 모양을 만들어내는 실뜨기가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 어린이 사이에서 피어나는 공기놀이
공기놀이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공기놀이의 재미를 넘어 평화로움과 만날 수 있다. 마치 공기놀이에 빠져든 아이들을 보면 깊은 삼매에 빠진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옆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골라서 가지고 놀았던 공깃돌에 큰 애착을 느껴 곱게 간직하거나 파묻어 놓기도 한다. 이런 놀이를 하면서 생긴 놀잇감에 대한 애착은 다른 일을 할 때도 이어진다. 이렇게 공기놀이를 되풀이하면서 아이들은 공기놀이의 세계를 조금씩 새롭게 만들어서 그 재미가 오늘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진 셈이다. 돌로만 하던 공기놀이가 플라스틱 공기의 등장으로 새롭게 생긴 ‘쌓기 공기’라는 것이 있다. 플라스틱 공기는 위로 층층이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생긴 공기놀이 솜씨이다. 이 밖에도 옛날에는 없었던 여러 가지 남다른 공기 형태가 요즘 아이들 공기놀이에서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 가운데 ‘씻기’, ‘오토바이’, ‘이삿짐’, ‘지우개’를 보면 앞선 할머니나 어머니 세대의 공기놀이를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하기가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기놀이 규칙
씻기: 집기가 어렵게 뭉쳐 있으면 집기 좋게 손으로 다시 흩트리는 것.
오토바이: 만약 한 알 집기에서 둘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건드려 죽으니까 하나를 멀리 떼 놓고 할 수 하는 것.
이삿짐: 내려 놓았는데 어려우면 하나를 주워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지우개: 넣은 공깃돌이 잡기 어려우면 집어서 다 뿌리고 하는 것.
요즘 아이들 공기놀이를 보면 점점 규칙과 제한이 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씻기’는 없고 ‘오토바이’는 있기 이런 식의 것들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규칙들에서 공기놀이 스스로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또 아이들이 공기놀이는 재미있는데 솜씨는 따라주지 않아 이런 새로운 규칙들이 만들어진 것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가끔 공기놀이에 푹 빠지는 아이들도 있기 마련인데, 이 아이들은 스스로 공기놀이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마침내 새로운 공기놀이를 창조하기도 한다. 공기놀이와 같은 옛 아이들 놀이는 한쪽을 완전한 패자를 만들거나 죽거나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재생과 부활과 성숙과 용기를 얻게 해주는 것이었다. 스팩터클과 엔터테인먼트가 만연한 세상의 한 가운데서 이렇듯 담백한 공기놀이의 가치를 살피는 일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1) 편해문, 「공기놀이의 전승 모습과 아이들의 공기놀이 현장」, 『실천민속학회 5』, 2003.
글 | 편해문_놀이터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