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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는 | 달력

시대와 문화를 담은 1년용 책 ‘달력’

12월. 이제 올해의 달력도 마지막 장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이를 바라보며 누군가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을 듯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말입니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이뤄 가는 과정을 점검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것으로 달력만 한 게 없습니다.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즈음이면 누구나 새해 달력을 하나쯤 챙겨 두는 것도 새해를 앞두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 마음을 단단히 고쳐 매기 위함이겠지요.
달력은 말 그대로 ‘달의 일기’로, 1년간의 날짜를 순서대로 표시해 놓은 일종의 책입니다. 해를 기준으로 날을 세는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달로 날을 셌는데요. 우리가 흔히 한 달, 두 달 할 때의 ‘달’ 또한 밤하늘의 달에서 뜻이 갈라진 말입니다. 즉 달의 변화에 따라 날수를 표시한 것으로, 달이 차고 기우는 한 달 치를 엮은 것이 달력입니다. 그리고 1년 열두 달을 한 책으로 만든 것이 책력冊曆이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달력’은 해를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지면 일력日曆 또는 양력陽曆이라는 말이 옳습니다. 다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누구나 다 그렇게 쓰는 ‘달력’이라는 말을 ‘양력’으로 바꿔 부를 까닭은 없습니다.

양력을 기준으로 한 근대식 달력
전통적으로 음력을 쓰던 우리나라에 양력이 도입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 고종 황제에 의해서입니다. 하지만 음력을 배척하고 본격적으로 양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입니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정책의 하나로 양력을 강제 시행합니다. 우리의 ‘설’을 오래돼 낡은 ‘구정’으로 부르고, 양력 1월 1일을 새롭고 좋은 의미의 ‘신정’으로 부르도록 하지요. 게다가 상순이나 중순 등 10일 간격이 익숙한 우리에게 1주일이라는 시간 개념도 적용합니다.

이러한 혼란은 일제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고, 음력을 고집하는 분위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경일은 양력이지만 명절은 여전히 음력이고, 요즘 젊은이들은 양력으로 생일을 보내지만 어르신들은 대부분 음력으로 생일상을 받는 것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양력인 날짜 아래에 작은 글씨로 음력을 표시한 달력이 여전히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가 나오는, 즉 양력을 기준으로 한 근대식 달력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입니다. 날짜를 따져 생산활동의 계획을 세우고 세시풍속 등을 미리 살필 수 있는 달력은 이후 일상생활에 아주 유용한 것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요일 아래로 양력과 음력이 있고, 24절기와 각종 행사일도 꼼꼼하게 박혀 있으니 서민들에게는 이만한 수첩도 없었을 겁니다.
거기에다 생일 등 가족의 기념일이나 부모님 기일 등을 표시해 두는 것은 물론이고 방세나 공과금 내는 날이며 빌려준 돈 받기로 한 날 등도 기록해 둘 수 있었으니, 그 역할이 요즘의 스마트폰에 뒤질 게 없었습니다.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달력은 한 가족의 일기장이자 가계부였던 셈입니다. 달력calendar이라는 말이 라틴어로 ‘흥미 있는 기록’ 또는 ‘회계장부’를 뜻하는 ‘칼린다리움calendarium’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딱 보여줍니다.

시대를 반영하며 변화해온 달력
달력은 한때 ‘살림살이’ 역할도 톡톡히 했습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달력은 날짜가 지난 뒤에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집집의 부엌 찬장에는 철 지난 달력이 깔렸고, 명절 때면 전을 부치고 소쿠리에 담기 전에 달력부터 깔았습니다.

겨울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가장 먼저 찾는 것도 철 지난 달력이었습니다. 그날 받은 귀하디귀한 새 학년 교과서를 새하얀 달력 뒷면이 앞이 되도록 해서 겉표지를 씌웠습니다. 그리고 남은 달력은 딱지로 접혀 그 시절 최고의 장난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달력은 더러 문풍지가 되거나 벽지가 되기도 했으며 매일 한 장씩 떼어내는, 얇은 습자지로 된 일력日曆은 화장실에서 고급 화장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력은 봉초담배를 궐련으로 말아 피우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고, 습자지 가운데에 엽전 하나만 넣으면 멋진 제기로 변신하기도 했지요.

이렇듯 쓰임새가 많았던 만큼 달력은 최고의 선물로 자리하기도 했습니다. 연말연시면 달력 구하기 전쟁이 벌어질 정도였지요. 우스갯소리로 ‘달력 확보 능력’은 곧 ‘권력’으로 통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 하는 달력은 우리의 생활사를 담은 채 변천해 왔습니다. 달력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1950년대에는 정치인 달력이 유행했지요. 정치인들이 지역구 주민들에게 돌릴 선물로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신문지만 한 종이판 한가운데에 자신의 사진을 큼직하게 박고 12개월을 빙 둘러 적곤 했지요.

또 1950∼1960년대에는 산아제한이나 절약 등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몽운동 문구가 적힌 달력이 적지 않았고, 1970∼1980년대에는 은막의 스타들이 대거 달력의 모델로 등장합니다. 당시 달력은 연예인의 인기를 가늠케 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달력 속 연예인의 옷차림도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한복 차림이 대부분이었지만 이후 양장차림이 등장하고, 이어 수영복이 나타나면서 갈수록 옷을 덜 입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무렵 달력의 주요 배경으로는 봄엔 창경궁, 여름이면 경회루, 가을이면 비원, 겨울이면 경복궁 등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 달력이 인테리어 개념으로 바뀐 1990년대 이후에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 달력에 등장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바보 산수’로 유명한 운보 김기창 화백의 경우 당시 판권료가 집 한 채 값인 수백만 원에 달했다고 하네요. 이 무렵부터 탁상용 달력이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벽에만 걸어두던 달력이 책상으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IMF를 겪은 뒤로는 달력이 귀하신 몸이 됩니다. 홍보용으로 제작되던 달력이 어려운 경기 탓에 생산을 중단하면서 한 집에서 한 개의 달력을 구하기도 힘들게 됐습니다.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생활 전반에 디지털화가 급속히 퍼지면서 종이 달력은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입니다.

요즘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특정 날짜의 요일이나 음력 따위를 알 수 있도록 고안된 디지털 ‘만년달력’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봐서는 달력인지 짐작하기 힘든 ‘만년달력’은 책상과 방을 빛내는 인테리어 소품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 달력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그러할 듯합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불경기 탓도 있지만, 알람은 물론 메모 기능까지 갖춘 스마트폰이 달력의 자리를 대신하는 까닭이 더욱 큽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달력은 왠지 가벼운 느낌입니다. 날짜 밑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담아놓는 삶의 희로애락이 스마트폰에서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보다 가슴 퍽퍽한 느낌이 드는 2020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2021년 새해에는 온 달력 속에 소중한 만남을 빼곡하게 적어 놓고, 그들을 모두 만나 한껏 웃음 짓기를 소원해 봅니다.


글 | 엄민용_경향신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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