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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는 | 호빵

당신의 11월도 호빵처럼 따뜻하길

어느덧 10월도 하순에 접어들었다. 10월이 끝날 즈음 3가지가 늘 등장했는데, 라디오에선 ‘잊혀진 계절’, 시장엔 붕어빵, 가게에는 호빵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11월이 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겨울이란 계절이다. 그런 겨울이 등장하면 호빵 역시 짠하고 등장한다. 마치 입동과 소설 두 절기 같지 않은가? 24절기 중 19번째와 20번째 절기. 특히 소설이 지나면 말 그대로 추위가 몰려왔기에 어머니께선 겨울 김장을 하시고, 두터운 겨울옷을 준비하셨다. 따뜻한 걸 찾게 되는 겨울의 시간, 붕어빵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호빵에 관한 얘기를 나눌까 한다.

추억 속에 자리 잡은 호빵에 대한 기억
1971년 출시한 호빵은 겨울마다 자리를 잡기 시작해서, 동네 구멍가게의 겨울 매상을 책임지는 그 당시 효자 아이템이었다. 쌀쌀한 초겨울, 호빵을 데우는 찜기의 등장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과도 같았다. 추운 계절에 갈 곳 없는 아이들은 동네 구멍가게에 삼삼오오 모여 달고나를 만들거나, 호빵 찜기 주변에 모여 윤기가 흐르는 호빵의 우아한 자태를 보며 김을 쐬기도 했다. 그러다 한 아이가 호빵을 사기라도 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나도 한입, 너도 한입 하며 배고픈 제비처럼 빽빽거렸고, 정작 호빵을 산 녀석은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하고 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렇게 동네를 누비다가 집에 돌아가 저녁이 되면 TV에서 호빵 광고를 했다.

겨울이 되어야만 볼 수 있는 호빵 광고, 어렸을 땐 호빵에만 관심이 있어 몰랐지만 1980년대엔 이연수라는 배우가 호빵 광고를 했다. 그전에는 가수 김도향이 CM송을 불렀고, 이후 90년대에 다른 가수가 불러 히트를 치기도 했다. 호빵 모델로 90년대 하이틴 스타인 최수종을 캐스팅하여 매출 상승에도 한 몫 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아이들의 구멍가게 집합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앞에 모여 있으면 돈이 없어도, 다른 친구에게 과자 한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하지만 호빵만큼은 예외였다. 어린 아이들에겐 한 개에 100원이나 하는 호빵 가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물가와는 달랐던 그 시절에는 나의 하루 용돈 역시 100원이었다. 80년대엔 50원짜리 봉지 과자도 20원짜리 껌도 있었으니, 호빵은 한마디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간식이었다. 더군다나 90년대엔 물가 상승으로 호빵 역시 200~300원으로 가격이 올랐다. 이러한 물가 상승률은 2000년대에 들어서 호빵 1개에 1,000원 정도로 육박하게 된다.

그런데도 호빵의 위상은 대단했다. 그 당시 용돈이 적은 아이들은 50원씩 보태서 둘이 나눠 먹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앞에 말한 것처럼 찜기에서 나온 호빵은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이들의 표적을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 물론 항상 뺏어 먹는 날만 있는 건 아니다. 어쩌다 주위 누군가의 친척 어른이 하나씩 사주기라도 하면 그날은 축제나 다름없었다. 오롯이 한 개를 아무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그 순간! 작은 호빵 하나에 온갖 행복과 미소가 번진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구멍가게에 모여 있는 건 순전히 호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주전부리가 흔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나면 으레 어머니께 호빵 타령을 하곤 했다. 매번 호빵~호빵~하는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부터 일을 마치고 집에 오실 때면 호빵 두 개를 들고 오시곤 하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외갓집에서 일하는 직원들 간식으로 호빵을 선택한 것이다. 봉제공장을 하는 외갓집에는 친척 외에도 직원이 제법 있었다. 그 시기 땐 야근이 일상이라 점심, 저녁식사 제공은 물론, 참간식도 제공했다. 외할머니는 처음엔 직접 국수나 라면을 해주기도 하셨지만, 식사 때마다 등장하는 호빵 광고가 할머니도 흔들리게 했다. 결국 외할머니는 큰외삼촌을 통해 호빵을 다량으로 구해왔다. 그렇게 구해온 호빵은 커다란 찜기에서 쪄서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몇 개는 우리 형제가 먹게 되는 호사를 누렸다.

나중에는 팥 앙금뿐만 아니라 만두소가 들어간 것 같은 야채호빵도 먹을 기회가 생겼다. 얼마 뒤 구멍가게에도 야채호빵이 들어왔지만 팥 호빵보다 50원 비싼 150원에 팔렸고, 이는 아이들의 구매를 망설이게 했다. 나와 내 동생은 큰외삼촌 덕에 맛볼 수 있었기에 아이들에게 야채호빵의 맛을 말로 표현하며 잘난 체하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50원이 올라도, 팥 호빵이 떨어지면, 손은 야채호빵으로 향했다. 호빵이 팔릴수록 겨울은 깊어져만 갔다.

시간이 흐르며 다양해진 호빵
그렇게 해를 거듭하며 호빵은 변함없이 그리고 다양하게 등장했다. 나 역시 호빵이 등장하는 만큼 나이를 먹었고, 1997년 말 IMF 때의 호빵은 일을 하는 모든 이에게 양식이었다. 그때의 호빵은 겨울의 김밥 같은 존재였으리라. 모든 가장이 한 푼이라도 더 벌고자, 밥 한 끼도 아까워 간단히 먹고 하루를 뛰어다녀야 했던 힘든 시간. 그렇게 힘든 시간을 넘어 2000년이 됐을 때 호빵도 조금씩 변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의 향수를 선사하는 아이템이라는 이미지의 변화와 더불어 IMF를 겪으며 ‘한 끼를 책임지는 음식’이라는 인식으로 발돋움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호빵엔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다. 그 옛날 완두콩이나, 잡채가 들어간 것처럼 요즘 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무언가로 말이다. 피자, 단호박, 햄치즈, 불닭 등을 포함해 많은 재료가 시도됐다. 심지어 초콜릿까지 말이다. 호빵 속 재료는 다양해졌지만 호빵이 주던 따스함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요즘도 호빵은 좋은 간식이자 추억을 공유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밥 살 돈이 없어 호빵 한 줄을 사서 나눠 먹은 애잔한 이야기도 등장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다. 최근 한 친구가 레트로 디자인의 호빵 찜기를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구매해 개인SNS에 올린 것을 보았다. 어릴 적 구멍가게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를 집안 한 구석에 재현해 둔 것이다.

친구의 호빵 찜기에서 쪄지는 호빵은 호빵이 아니라 추억이 아닐까 싶다. 한입 먹는 순간 어린 시절의 나와 조우하는 마법 같은 시간임이 분명하다. 친구들과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때론 자신의 첫사랑을 상담하고, 어떤 날은 나의 대학입시를 걱정하며 나누던 대화들. 주름진 모습이 아니라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고 호~호~하면서 호빵을 먹던 그때 그 시절 말이다.

어느덧 11월이 되었으니 그 친구가 직접 호빵을 쪄주겠다며 나를 초대할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호빵으로 우린 다시 어린 시절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추억이란 건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마주할 때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11월, 호빵은 나에게 유년시절 친구들과 어울렸던 가난했지만 즐거운 시간을 상기시켜준 아이템이다.

당신의 11월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당신도 나처럼 호빵으로
기억의 하나를 공유할지도 모르겠다.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호빵은 당신에게 호호 불어가며
먹던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이니까 말이다.

지난 휴일 어머니를 뵙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편의점 문에 ‘호빵 있어요’라고 붙여있는 걸 봤다. 그 글을 보고 있자니 겨울이 와서 호빵이 나온 게 아니라, 호빵이 나와서 겨울이 온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제 곧 많은 이들이 호빵을 사먹을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많은 추억이 쌓일 것이다. 그립고 따뜻한. 당신의 11월도 호빵처럼 따뜻하길 바란다.


글 | 김원근_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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