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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는 | 모던걸과 모던보이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등장, 자유연애가 시작되다

길고 추웠던 겨울을 버텼던 만물이 본격적으로 생동하는 5월, 절기로는 입하立夏와 소만小滿이 껴있어 본격적으로 계절을 즐기기에 좋은 때이다. 만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따뜻한 햇볕에 사람의 마음 또한 생동거리기 마련이다.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봄일진데 삶이 늘 봄인 청춘들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거리며 카페며 술집이며 청춘연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기 좋은 시절이다.

그렇다면 백여 년 전, 이 땅에 막 불어 닥친 근대화 당시 연인들의 데이트 풍경은 어떠했을까? 근대화가 모든 부문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듯이 연애 또한 혁명적 변화를 맞이했다. 그 변화는 ‘연애戀愛’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에 먼저 ‘연애’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자유연애’의 시작
연애라는 말이 조선에 처음 등장한 것은 소설을 통해서였다. 1912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조중환의 번안작 『쌍옥루』에서 “청년 남녀의 연애라 하는 것은 극히 신성한 일”라는 문장에서 연애가 등장한 이래 여러 소설에서 연애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소설가 김기진은 1920년대 중반에 “연애라는 말은 근년에 비로소 쓰게 된 말”이라고 하였다. 7,8년 전만 해도 없었는데, 그 후 ‘자유연애’라는 말의 약어로 널리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가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연애는 남녀관계와 결혼에 관한 유교 도덕과 신분제적 억압에 대한 반발과 거부를 포함하고 있는 용어이다. 연애는 짝을 필요로 한다. ‘자유’연애를 하려면 먼저 전통과 인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대방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한 점에서 자유연애는 모던걸, 모던보이의 등장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경성의 연인] 애정 표현을 하는 젊은 남녀를 풍자한 신문기사 사진
“아이스컵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해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먹는다. 그래도 모자라서 혀끗을 빳빳치 펴서 ‘아다시! 아이스고히가, 다이스키, 다이스키요!(전 아이스커피가 좋아요, 좋아)’, ‘와시모네(나도 그래)’”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등장
모던걸Moderngirl과 모던보이Modernboy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봉건신분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여성 및 남성 집단을 일컫는 단어였다. 근대를 뜻하는 modern과 소녀, 여성을 뜻하는 girl의 합성어인 모던걸Moderngirl은 1910~20년대에 머리는 단발로 짧게 자르고, 외양은 서구식 옷과 신발로 꾸민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서구근대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여성을 일컫는 말로, 구여성과는 다른, 새로운 의식을 갖춘 여성을 뜻한다. 이들은 자유연애와 낭만적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모던보이Modernboy는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꿔 입고 장발을 서구식 단발을 하고, 서구 사상을 공부한 일군의 남성들을 지칭하였다. 이들 또한 모던걸과 함께 전통적, 봉건적 관습과 풍속에 저항하며 새로운 연애 풍속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하단의 그림처럼 이들은 보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대가리를 부비대고’, ‘혀끗을 빠빠치 펴서’라는 표현에서는 갑자기 등장한 자유연애의 풍속을 바라보는 불편한 심정이 느껴진다. 또 ‘아디시, 아이스고히가 …’ 등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적은 것은 이들이 일본의 풍속을 들여왔음을 암시하면서 식민지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반발감을 들게 하고 있다. 즉, 근대의 연애는 결코 식민지 조선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 그리고 서구 근대의 문화적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이 꿈꾸었던 낭만적 사랑과 연애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1. 모던걸을 대표하는 나혜석의 연애와 삶
나혜석은 1913년 열일곱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서 공부하였다. 일찍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그는 조선 여성에게 남녀평등을 깨우치고 구습 타파를 주장하는 글을 썼다. 일본 유학 당시 나혜석은 최승구라는 게이오대학에 다니던 젊은 시인과 연애 중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조혼(1910년대 평균 혼인 연령은 15살이었다)이 풍습이었으므로 최승구는 조선에 두고 온 아내가 있었다. 이들의 연애는 짧은 봄날처럼, 최승구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조선에 두고 온 구여성 아내와 모던걸 나혜석 사이에서 갈등하던 최승구가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끝내 요절한 것이었다. 1920년 나혜석은 최승구가 죽은 후 알게 된 오빠의 친구 김우영과 혼인하였으나 이들의 혼인 생활은 15년 만에 파경에 이르게 된다. 나혜석은 이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한 대중잡지에 투고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는데, 파경의 결정적 이유는 나혜석의 외도였다.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은 남성도 기생집을 드나드는 등 숱한 외도를 하면서 여성에게만 외도의 비난을 씌우는 사회와 남성을 비판했고,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려면 남성도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 모던걸 윤심덕과 모던보이 김우진의 연애
또 다른 대표적 모던걸, 모던보이로는 윤심덕과 김우진을 빼놓을 수 없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처음 만난 건 1921년 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동우회 순례극단에서였다. 조선에 처음으로 등장한 서양성악가였던 윤심덕의 존재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와세다 대학에서 극작 공부를 하였던 김우진은 조선에서 신극운동을 펼칠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결혼을 했던 김우진과 윤심덕의 연애가 순탄할 수가 없었다. 김우진은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구여성과의 부부생활을 했고, 목포에서 가업을 이어받으라는 아버지에 의해 꿈꾸던 신극운동도 좌절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윤심덕 또한 성악을 하면서 안정적 수입을 얻을 수 없었기에 경성방송국에 나가서 대중가요를 부르며, 시낭송도 하고 사회도 보는 방송인이 되었다. 윤심덕의 인기는 날로 커져가고, 온갖 연애 스캔들이 잊을만하면 언론에 실리곤 했다. 지칠대로 지친 윤심덕과 김우진은 장래를 논의하던 중 함께 연극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우진이 각본을 쓰고 윤심덕이 주연배우를 했으나, 연극은 흥행에 실패했고 이어서 올린 오페라 <카르멘> 또한 실패하였다. 연이은 실패에 지친 연인은 점차 자신들이 맞닥뜨린 조선의 현실에 좌절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함께 건너가 윤심덕의 마지막 노래 <사의 찬미>를 녹음한 뒤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함께 현해탄에 뛰어 내려 생을 마감하였다.

봉건제적 사회에 거세게 도전했던 1세대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운명은 대부분 비참하게 끝났지만 이들이 남긴 사랑과 연애에 대한 낭만적 감정과 풍속은 여전히 우리의 연애풍속에 남아 있다. 국권을 빼앗겨 자유를 억압당하고 살아야 했던 어두운 식민지 시절에도 젊은 청춘들의 연애와 사랑은 꽃을 피웠듯이 사랑과 낭만은 오늘도 우리 곁에 있다.


글 | 이철_작가_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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