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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는

뉴트로 문화의 시작과 끝, 서체

“‌디지털 매체를 접하며 세계시민으로 성장한 Z세대(1995년 이후 출생자)가 새로움으로 발견한 것은 편리한 신기술이 아니라 다름 아닌 한국문화였다.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과거의 문화를 촌스럽다거나 한물간 물건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소비하고 있다. 이렇게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는 일상 속의 디자인에서 찾을 수 있다. 간판, 책표지, 포장지 등에서 공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서체디자인이다. 서체는 예술보다 더 쉽고 빠르게 소비되는 감각적인 시대의 모습이면서 기억으로 한국인들과 함께 해왔던 대표적인 시각디자인이다.”

영상과 음성이 기록되고 전달되기 전에 글자는 유일하게 기록과 전달이 동시에 가능한 수단이었다. 특히, 물건을 직접 내어놓고 팔던 시기를 지나 고정된 상점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그 상점이 취급하는 물건을 알리거나 상점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내건 간판은 상인과 취급하는 상품의 얼굴이 되었다. 어느 동네를 가던지 가장 중심가에는 이런 글자들이 어지러이 붙어 있었고 이는 시대의 얼굴이 되었다. 또한, 이렇게 사용되어온 과거의 글꼴들은 사라지고 알파벳과 알파벳을 닮아간 정교한 글꼴들로 바뀌면서 도시의 모습은 새롭게 변화되고 취급하는 재화도 바뀌어 왔다. 그렇게 잊혀졌던 오래된 글꼴들이 하나 둘씩 다시 보이면서 ‘레트로’, ‘뉴트로’라는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정교하게 계산해준 미려한 형태가 아닌 약간은 서툰 듯 보이는 손글씨와 손으로 작도한 한글의 매력을 다시 살펴보자.

정방형 안에 힘찬 획으로 쓴 붓글씨체 –
을지로 붓글씨체

문 위의 가림막에 써넣은 상호명(좌), 오래된 한옥 위에 철판으로 제작한 간판(우) ⓒ 진현호


을지로는 조선시대부터 훈련도감과 관우에게 제사를 모시던 사당이 있던 곳으로 근대 이후에는 제조 산업 공장들과 도매상들이 밀집하여 번성했던 장소였다. 지금은 낙후되어 재개발이 불가피해졌지만 도시 재생의 차원에서 문화유산으로 인식되어 재개발이 지연되고 있다. 그래서 좋은 점은 이 지역의 흔적과 얼룩이 그대로 남아있는 시각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을지로4가 쪽으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 보면 철공, 기계, 조명 등의 작은 점포들이 힘찬 붓글씨 획들로 씌여진 간판들이 남아있다.

을지로의 간판들은 나무나 알루미늄 판에 흰색을 입혀 붓글씨로 쓴 서체가 많은데, 이러한 서체는 서예용 둥근 붓이 아니라 페인트용 넓적붓으로 쓴 것이 대부분이다. 그냥 보면 동네에서 붓글씨를 좀 쓰던 분이 자신 있게 쓴 것 같아 보인다. 을지로만의 독특한 붓글씨는 크게 궁서체를 기본으로 한 흘림체와 둥글게 굴린 굴림체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지역의 서체들은 모두 비슷한데, 그 붓글씨의 획돌기나 끝을 힘차게 각을 주고 쓸어내리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면 이 지역의 간판 제작자가 여러 명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될 만큼 비슷한 서체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처음 간판 제작자가 시작했던 붓글씨의 형식을 후대에서 계속 모방해서 그대로 반복해서 제작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 정도로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이러한 붓글씨체는 ‘을지로 타이포그래피,’ 즉 ‘을지로 서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정방형의 붓글씨 형식을 직접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진 바가 없지만, 을지로에 밀집해 등장하기 때문에 을지로 서체로 이해될 수 있었고, (주)우아한 형제들은 을지로체를 모방한 서체를 무료로 배포하기도 해서 이제는 컴퓨터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한글 폰트가 되었다.

필름지에 레터링한 한글 간판 속의 젠더의식

이정이 고전의상실에 남아 있는 디자이너의 이름 ⓒ 노희주
필름지를 오려서 직접 제작한 상호명은 감성적이다 ⓒ 노희주


을지로 근처 광장시장 쪽에도 사라져가는 업종이 간판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종로5가 쪽에 밀집해 있던 의상실들은 이제 그 간판만 남고 상인들과 손님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라져가고 있다. 의상실 간판은 붓글씨가 아니라 전문적인 간판 제작자들이 필름지에 글자를 레터링하여 스티커 형식이나 커팅하여 붙인 방식으로 서체는 각이 진 한글로 되어 있는 것이 많이 보였다. 가끔 점포의 주인이 직접 꾸민 것도 있다. ‘이정이 고전의상실’, ‘나씨 아줌마 한복일체’, ‘관구네 자수’, ‘꽃신’과 같은 상호명을 통해서 점포의 주인이 여성이거나 여성들을 위한 물품을 제작하는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로5가의 포목점을 중심으로 근방에 형성되어 있던 한복맞춤 전문점이었던 의상실을 운영하던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했던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의상실이라는 명칭에서 주문 제작 방식의 맞춤복 문화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했던 여성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역에는 유리벽에 시트지를 덧씌우고 한글을 커팅 방식으로 제작하여 붙이는 방식이 많았지만 눈에 띄는 점은 상호명이었다. 이러한 간판을 통해 각 의상실마다 의복을 제작했던 디자이너이자 생산자로서의 여성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기록되지 않았거나 배제되어 있었던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각이 진 한글서체

강북구 수유동 대우전자(좌), 전북 군산시 영화동 영화건강원(우) ⓒ 조혜영


붓글씨 간판과 시트지 각진 한글체로 쓴 간판에 이어서 1980년대 이후에 등장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서체의 간판들도 남아있다. 강북구 수유동 삼양로 92길에 위치한 건물의 간판을 보면, 이제는 사라진 기업의 로고와 CICorporate Identity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1980년대 삼성과 금성지금의 LG과 함께 가전제품을 생산하던 대우전자의 상표와 함께 브라운 전자도 함께 소매업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간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나던 길에 발견해서 가게를 둘러보았는데 작은 코너에 위치한 가게의 일부만 남기고 그 옆에 사슴 수퍼마켓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점포의 주인은 대우전자가 1997년 외환위기로 브랜드가 바뀌게 되는 운명과 함께 가게를 그만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가게를 팔거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이 자체로 큰 의미가 되었다.

또 다른 예는 전북 군산에 있는 영화 건강원의 간판이다. 일본식 적산가옥 형태의 2층 건물 옆에는 적어도 100년은 넘었을 것 같은 버드나무가 빼곡히 그 세월을 함께하고 있어서 건강원과 버드나무가 함께 그 장소성을 만들고 있다. 즉 버드나무가 있는 자리를 기준으로 길이 생기고 건물이 지어지고 간판이 생겼을 것인데, 이들의 조합은 오래된 가족처럼 친구처럼 매우 친숙한 조화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간판 그리고 우리말에 대하여


한 시대의 정서와 공감대는 물질적으로 드러난다. 문학은 책이나 인쇄물로, 예술적 감성은 매체를 통해서 음악, 미술, 무대예술 등을 통해서 반영된다. 시각문화는 새로운 기술과 문화 혹은 사회적 가치를 드러낸다. 그러한 맥락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복고, 레트로에 대한 현상은 소비지향적인 경제 순환 속에서 과잉공급과 지나치게 빠른 유행의 속도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는 항상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의 레퍼런스, 혹은 참조가 되었다. 미래에 대한 환상과 믿음으로 속도와 성과만 집중하다가 꽤 많은 것을 그냥 무심코 차창 밖의 가로수 지나치듯 지내왔던 것일 수도 있다. 지나 온 길에 무엇이 있었나 하는 생각해 보면 다시 기억해 보면 소환되는 것들이 있다.

을지로의 붓글씨체와 필름지에 규격 없이 그린 듯한 한글 서체를 통해서 외래어와 고유의 보통명사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모두 우리가 쓰던 말들이고 읽던 소리기호이기에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친근하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을 만난 것처럼 자꾸 웃음이 난다. 우리는 한글창제 이 후에도 언문이라 하여 한글은 여성들과 백성들이 사용하였고 지식인들은 한자를 썼다. 그러다 근대에 이르러 외래어와 구별되는 우리말을 한글로 표기하면서 한글표기가 확산되었고, 한글과 우리말 사용은 우리들의 정체성과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한글은 한국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시각문화다.

한글서체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인쇄용 서체나 궁서체가 유럽 전통의 타이포그래피와 만나 더욱 견고해졌고 1970년대 이후 한글 레터링은 다각적인 변화와 도전을 시도하게 된다. 서구 모더니즘의 사진 식자와 납활자로 표현되는 인쇄매체의 표현의 방식에 한계를 느끼며 저항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인 억압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기존의 인쇄를 위한 방식이 한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전환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알파벳을 기본으로 한 인쇄술과 편집방식에 대한 혹은 한자의 세로쓰기에 대한 저항으로 한국어와 한글에 적합한 방식을 찾기 위한 노력이 다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체 디자이너들은 서구의 알파벳, 즉 타이포그래피 방식과 스위스의 국제주의 시각언어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외국문화에 대한 저항의 방식으로 한글 글꼴에 대한 다양성을 시도하였다. 한글 서체는 시각성과 물질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기록이 된다. 수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이야기와 소문들, 유행과 감성들은 물질들로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글 서체는 역사가 다 서술하고 기록하지 못했던 영역에서 흔적과 얼룩으로 남아있었고, 우리가 다시 발견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소환해 낼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유행 지난 한글 간판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에서 자라며 서로 부딪히며 사는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을 그런, 그런 느낌적인 것들이 있다. 을지로의 간판들과 잊혀져가는 브랜드들의 낯익은 시각성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그런 얼굴들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지니고 있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이야기들과 사람들 말이다.


글_조혜영 | 디자인역사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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