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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평양냉면은 정직함이다

평양냉면이 인기다.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초로의 실향민이 즐겨 찾던 이 ‘슴슴한 맛’의 시원한 국수는 이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여름이면 이름난 냉면 노포들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 자리한 을밀대 역시 ‘평양냉면 맛집’ 하면 빠지지 않는 곳. 1976년 창업주 김인주 선생이 개업한 이래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맛을 지키고 있다. 이곳의 냉면을 책임지고 있는 윤민정 주방장을 만나 긴 세월 변함없이 이어 온 그 맛과 인기의 비결을 들어보았다.

Q. 을밀대는 서울 시내 유명 평양냉면집 중 하나로 꼽힌다. 을밀대의 역사가 궁금하다.

윤민정 주방장이하 윤민정_을밀대는 평안남도 안주 태생의 고 김인주 사장이 1976년 염리동 주택가에 문을 연 평양냉면 전문점이다. 평양냉면이 지금 같은 인기를 누리지 않았던 개업 초기에는 나이든 실향민들이나 근방 대학교 교수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1998년 장남인 김영길 씨가 을밀대 경영을 물려받았고 나는 김인주 선생이 2005년 돌아가신 직후 주방에서 일하며 냉면을 말아 왔다.

Q. 십여 년 전만 해도 평양냉면은 중절모 쓴 이북 출신 할아버지의 음식이었다. 그런데 오늘 식당에는 오히려 젊은이들 숫자가 많아 보인다.

윤민정_손님들 세대교체가 일찌감치 이뤄진 편이다. 수십 년 단골 중 돌아가신 분도 많은데 어릴 적 할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왔던 아이가 자라서 다시 자녀와 함께 이곳에 온다.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영향도 컸다. 평양냉면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전보다 다양한 지역과 직업, 연령층의 사람들이 평양냉면을 즐기게 되었다.

Q. 가장 바쁜 계절은 역시 여름인가?

윤민정_의외로 한여름보다 5월이 더 바쁘다. 가정의 달이다 보니 외식을 하러 오는 가족 단위 손님이 늘어난다. 그 외에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비슷하다. 을밀대는 주택가 외진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다. 근처 직장인도 많지만 멀리서 찾아오는 오랜 단골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Q. LG 그룹 고 구본무 회장이 을밀대 단골이라는 뉴스도 나왔었다.

윤민정_오랜 단골이셨다. 자동차를 멀리 세워놓고 수행원도 없이 혼자 뚜벅뚜벅 걸어와 조용히 냉면을 즐기시곤 해서 오랫동안 평범한 노신사인 줄만 알았다. 고 노회찬 의원도 우리 집 냉면을 정말 좋아했다. 발인하던 날 가족들이 우리 집 냉면을 올린다며 한 그릇 포장해갔을 정도다. 40년 단골인 가수 현미씨는 홍보대사를 자처하신다. 오랜 단골이 정말 많다. 여기서 일하면서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유명인사는 거의 다 보았다.

Q. 43년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는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윤민정_많은 이들이 우리 집 맛의 비결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정직함이다. 맛은 정직함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더라. 을밀대에서는 정직한 사람들이 정직한 마음과 정직한 재료를 가지고, 배운 그대로 정직하게 냉면을 빚는다. 재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결국 좋은 재료로 정직하게 만들어 대접한다면 손님들이 그 맛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고 믿는다.

Q. 정직함이라는 원칙 안에서 어떤 재료를 어떻게 다듬어 내놓는지 궁금하다.

윤민정_우리는 창업주의 방법을 그대로 지킨다. 우선 육수가 중요한데, 우리는 수놈 한우를 고집한다. 시골에 가면 어느 헛간에나 있던 누렁이 얘기다. 고깃집은 부드러운 육질이 중요하니 암소가 좋지만 국물을 내려면 근육질의 수놈이 좋다. 잡내가 없고 맛이 깨끗하다. 물론 요즘 세상에 수놈을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우리에게 고기를 공급해주는 분은 수놈 황소를 찾아 시골에서 한두 마리 사육하는 어르신들까지 만나고 다닌다. 그래도 그분이 ‘대한민국 황소의 씨가 마를 때까지 책임지겠다’고 해서 그거 하나 믿고 장사하고 있다(웃음). 내가 알기로는 한우 중에서도 황소로 육수를 내는 집은 전국에 우리뿐인 걸로 안다. 메밀과 녹두 역시 마찬가지다. 농장과 직거래하는 농협과 계약해 믿을 수 있는 국내산 메밀과 녹두를 쓴다.

Q. 평양냉면 외엔 메뉴가 단출한 편인데, 특이하게 홍어가 들어 있다

윤민정_회냉면 때문이다. 처음에는 물냉면만 했는데, 아무래도 비빔냉면을 찾는 이들이 있다 보니 구색을 맞추기 위해 회냉면을 넣었다. 그런데 또 간재미처럼 적당한 재료를 쓰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진짜 국내산 홍어를 찾으려고 수산시장을 뒤져 납품처를 찾았다. 회냉면에 고명으로 올리는 홍어는 몇 점 안 되다 보니 결국 메뉴에 홍어가 들어가게 되었다. 상 위에 올라가는 재료 하나하나 최상의 것을 고집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Q. 창업주의 뜻과 철학이 아직도 강하게 느껴진다. 김인주 선생이 생전에 강조한 이야기들이 또 있었나?

윤민정_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잠시 쉬려고 생전 그분의 쉼터였다는 본관 옥탑방에 올라가 누웠는데 벽면을 빼곡하게 메운 낙서가 있었다. 딱 두 단어였다. ‘위생’, ‘청결’. 내가 오랫동안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건 ‘기본’이었고, 그게 바로 위생과 청결이다. 위생과 청결이 지켜져야만 음식이 좋아지고 먹는 사람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다. 아직 그런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 두 단어를 가슴에 늘 담고 계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Q. 주방장으로서 을밀대 냉면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추천한다면?

윤민정_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먹는 게 가장 좋다. 식초도 겨자도 뿌리지 않은 채로. 처음엔 심심하게 느껴지겠지만 어느새 육수와 메밀 본연의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식초도 치고, 김치도 한 점 얹어 먹으며 다양한 맛의 변주를 즐겨보는 것이 좋다.

Q. 평양냉면 장인 입장에서 평양냉면 맛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윤민정_나에게 평양냉면 육수는 물과 같다. 우린 물 없이 살 수 없지만, 그 물을 ‘맛있다’고 생각하며 마시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 맛도 없는 무색무취의 음료이지만 오래 먹어도 질리지 않고 우리 몸에 필수적인 것이 물이다. 많이 먹어도 웬만해선 탈이 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을밀대의 육수도 사람들에게 차가운 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싶다.

Q. 을밀대를 지키는 주방장으로서 앞으로의 꿈이 궁금하다.

윤민정_처음 을밀대를 찾은 손님들이 1세대라고 할 때 지금은 그분들의 2세, 3세가 우리 집을 찾고 있다. 그 2세, 3세의 자녀와 손주들 그러니까 5세까지 우리 집을 찾아오면 좋겠다. 음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도 정직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냉면을 대접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그게 을밀대의 꿈이다.

인터뷰_편집팀
사진과 동영상_김대진(지니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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