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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음반 콘텐츠, 효과음에서 게임까지

음반音盤은 음의 기록물로서 소리를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재생해서 들을 수 있는 편리한 발명품이다. 음반은 1877년 에디슨에 의해 처음 발명되었다. 음반이 처음 발명될 당시에는 원통형 음반이었고 나팔통이 달린 유성기로 재생했다. 그 후 원통형 음반은 평판으로 발전했다. 평판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레코드 프레스 기술이 부족하여 한쪽 면에만 소릿골을 새기고 뒷면은 소릿골을 내지 못한 일명 ‘쪽판’이 생산되었다.

초기 음반 취입 방식은 나팔통에 대고 녹음하는 기계식이었고 그 후 마이크가 발달하면서 전기식 녹음으로, 모노에서 스테레오와 디지털로 발전을 거듭했다. 음반 매체도 유성기 음반Standard Playing에서 장시간 음반Long Playing과 컴팩트 디스크, 유에스비USB 제품 등으로 점차 발달되어 왔고 오디오 또한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다.

 

1877년 에디슨 음반 발명, 1896년 한국인의 첫 녹음

1880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이양선異樣船에서 프랑스 신부가 평양 감사에게 유성기를 선보였는데, 이것이 한국에 유성기 문물이 처음 유입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 당시만 해도 어떤 음악인지보다 희한한 기계에서 소리가 나온다는 그 자체에 사람들은 놀라고 신기해하고 충격적인 유희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오늘날 음반은 소리뿐 아니라 영상과 활자까지도 저장할 수 있는 기록물로 발전했다. 음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되자 이제 음반은 책이나 다른 어떤 기록 매체보다도 다양한 정보를 생생하게 담을 수 있는 기록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래서 음반은 이제 음악 외에도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기록 매체로서 대접받고 있다.

 

초창기 음반에는 단순한 효과음과 짧은 노래 등이 담겼다

 

한국의 음반 산업은 서양 문화를 일시에 소화할 수 밖에 없었던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음반 산업은 출발부터 한국 나름의 고유한 음반 문화를 가꾸어 나가지 못했고 외국인의 손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한국인이 남긴 음반 가운데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전 녹음은 1896년 미국에 있던 안정식, 이희철 일행(전문 음악인이 아닌 한국 동포들)이 취입한 ‘애국가’(민요조), ‘아리랑’(해주 아롱타령) 등 에디슨 원통형 음반 6개, 17분 분량이다. 이 진귀한 음반들은 대량 생산의 상품이 아닌 학술 목적의 기록용으로 녹음된 것인데 요즘의 녹음기처럼 현장음을 단 1장의 레코드에만 즉석 기록한 것들이다.

 

1900년대 미국 음반사의 한국 진출

한국인 녹음이 담겨있는 최초의 음반 상품은 1906년 미국의 빅터 음반회사와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취입된 동편제 명창 송만갑의 판소리, 경기 명창 한인오와 관기官妓 최홍매의 민요 등 쪽판이다.

한국이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직후 일본 음반회사인 일본축음기상회가 한국에 들어왔다. 이 일본 회사는 미국 음반회사보다 거리상으로 우리나라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한일 강제합병으로 여러 가지 조건이 유리했다. 그 후 여러 일본 음반회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많은 유성기 음반을 제작하였고 일제 강점기 한국 문화예술인의 음반을 제작한 회사는 거의 대부분 일본 음반회사였다.

 

1906년 미국 빅터 음반사가 낸 한국 최초 판매용 음반에는 송만갑 명창의 ‘농부가’를 담고 있다_국악음반박물관

 

한국인은 예부터 유난히 가무악을 좋아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한국 내에 유성기와 음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간 사람들이 접하기 어려웠던 정악, 어전 광대들의 판소리 등을 대량으로 상품화하였다. 그에 따라 음반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부의 상징, 멋 내고 뽐낼 수 있는 명품, 소장 가치가 높은 예술품으로 급부상하였고 한국 내에 유성기와 음반, 라디오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1927년 경성방송국JODK에 의해 한국 최초의 정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는데 라디오 방송이 정식으로 개국한 것은 한국이 세계 6번째이다.

 

국악이 대중음악이었던 음반 역사 초기에는 거의 국악 음반 위주로 제작되었고 특이하게 동물 소리 흉내 녹음 음반도 인기를 끌었다. 1913년부터는 일축 회사에 의해 본격적으로 한국 내의 양악이 음반으로 취입되기 시작했다.

양복 입고 자동차, 라디오, 유성기 장만하고 사람들 모아 놓고 평소 듣도 보지도 못한 양식을 대접하며 희한한 양악 소리를 들려주면 당시 사람들은 우주선을 목격한 것처럼 깜짝 놀라고 부러워도 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음반에 담기는 녹음과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음악은 차츰 외래 음악이 국악을 밀어내고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유성기와 음반은 음악 감상의 차원 외에 부의 과시, 첨단 신문물 소유 욕구, 새로움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의 측면으로도 대중에게 강하게 작용했다.

 

초창기 LP에는 대국민 홍보나 계몽을 위한 노래가 담기곤 했다

 

광복과 함께 시작딘 한국의 음반 산업

1896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인이 녹음한 유성기 음반은 7천종 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일제 강점기~1940년대 라디오 방송 당시 방송용으로 여러 녹음들이 기록되었으나 6.25 한국전쟁 당시 거의 모두 파괴, 소실되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한국은 일본의 직배 음반회사 체제에서 벗어났고 이때부터 한국 자체의 힘으로 음반을 제작하게 되어 실질적인 한국의 음반 산업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LP(장시간 음반)를 처음 제작한 것은 1958년 공보실 레코드제작소였다.

 

한국의 초기 LP 시대에는 많은 음반회사가 있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각지에 크고 작은 음반회사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주로 대중가요 음반을 제작하기에 분주했다. 1980년대 중반은 국악 음반이 가장 적게 제작된 시기로 시중에서 정품으로 구입할 수 있는 국악 음반이 10여 장에 불과했다. 이때는 한국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국악 음반을 더 많이 제작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국악 음반 제작 붐이 일어났고 그 후부터 지금까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은 자국의 전통 음악 음반을 가장 많이 제작한 나라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 중고 LP는 가요가 500원, 팝송은 3,000원 정도 했는데 1994년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 책이 나오면서 역전되기 시작하여 팝송 LP는 값이 별 변동이 없으나 한국 LP는 세계적인 고가판으로 급등했다. 한국 LP는 1993년부터 급속히 사양길에 접어들어서 1995년에는 시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LP를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한 CD(컴팩트 디스크)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에스케이시(SKC) 회사에 의해서다.

 

CD와 DVD에는 음악뿐만 아니라 영상과 게임을 저장한다

 

21세기 세계 음반 시장 중심에 선 한국 음악

한국에서 예술 분야가 동영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일제 강점기 일본인, 미국인 등 주로 외국인에 의해서였다. 개인적인 민속 수집 취미, 연구 차원과 상업적인 영화 촬영 목적 등으로 국악, 무용을 비롯한 몇몇 한국의 예술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동영상 기록 매체는 영화 필름, 비디오테이프, 레이저디스크(LD), 디브이디(DVD) 등으로 변천되어왔다.

영화 필름, 각종 비디오테이프와 개인 비디오카메라까지는 한국이 더디게 소비자들에게 다가갔다고 할 수 있으나 레이저디스크부터 디브이디 등 최근 유행하는 동영상 매체의 경우는 여타 어느 국가보다도 보급 속도와 생산량이 앞섰다.

 

또한 한국 영화의 경우 현재 세계적으로 굉장한 성공 신화를 쓰고 있고 그러한 호황 분위기를 타고 영화 속에 한국의 여러 문화예술이 다채롭게 어우러져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신중현, 방탄소년단 등의 한국대중음악이 21세기 세계 음반 시장 중심에 서 있다. 한국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긍지, 자신감을 갖고 한국 나름의 알찬 음악 상품 개발과 치밀한 기획을 덧붙인다면 세계적으로 더욱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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