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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시

운명이 여기에 있다

특별전 <김수남을 말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있다. 카메라와 수첩, 그리고 흑립이다. 카메라는 김수남의 평생을 함께한 운명과 같은 것이고, 수첩은 사진으로는 채우지 못했던 것을 끊임없이 적어나가던 그의 기록, 그리고 흑립은 굿판에 동화되어 피사체와의 친밀감을 형성하던 그의 열쇠다. 특별전 <김수남을 말하다>를 기획한 유물과학과 김형주 학예연구사를 만나 김수남과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카메라, 김수남, 만남

김수남이 처음 사진을 접하게 된 것은 1967년 연세대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당시 학교 신문사인 ‘연세춘추’와 사진반 ‘연영회’에 몸을 담으면서 사진에 대한 그의 태도,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가 막 움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2006년 태국 치앙라이에서 잠들기까지 그는 자신의 삶을 온통 사진으로 채웠다.


“2015년 김수남 선생의 유족이 국립민속박물관에 선생의 사진들을 기증해 주셨어요. 김수남 선생도, 또 그 분의 활동도 워낙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사진들을 어떻게 재해석 해낼 것인가를 정하는 데에 굉장히 많은 고민이 필요했죠. 선생께서 생전에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를 잘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진을 고르는 일뿐만 아니라 프레임, 프린트까지 심혈을 기울였어요.”

김수남은 떠났고, 사진만 남았다. 전시를 준비하며 그에게 확인하고 싶고, 또 묻고 싶은 것 투성이지만, 대신 그의 지인들을 만났다. 제자, 동료,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 김수남과 그의 세계를 간접체험 했다. 생전에 남긴 인터뷰나 기록도 끊임없이 살폈다. 그렇게 김수남을 조금씩 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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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전시, 기록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가 마음을 빼앗긴 것이 왜 ‘굿’이었냐는 것이다. 그 배타적이고 날것인 세상에 제 몸을 욱여 넣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1970~80년대의 대한민국은 정말 많은 것이 바뀌던 시절이었잖아요. 선생뿐만 아니라 ‘기록’에 사명감을 가진 분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남겨두기 위한 작업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의 분들이 풍경이나 건물, 집 등에 집중했어요. 그런데 김수남 선생을 움직이게 한 것은 ‘굿’이었어요. 단지 미신이라는 이유로 무당들이 경찰서에 잡혀가고, 탄압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셨나 봐요. 그때부터 굿판을 찾아 다니신 거죠.”

그렇게 그는 몇 년 굿판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어느 날 문득, 찍어놓은 사진을 살펴보다 자괴감에 빠졌다고 한다. 사진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다 똑같아 보여서였다. 김수남은 결국 카메라를 내려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굿 공부였다. 그렇게 꼬박 몇 년을 공부한 뒤, 다시 굿판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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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용포 수망굿 | 1981년 | 경북 포항시 | 서낭대를 흔들며 망자의 혼을 부르는 김석출 양중
2. 옹진 배연신굿 | 1981년 | 인천 강화군 | 무사안녕을 바라며 배 위에서 부정풀이를 하는 김금화 만신
3. 제주도 신굿 | 1981년 | 제주시 구좌읍 | 자손의 번창과 출생을 주관하는 불도할망이 오는 길을 만드는 한일춘 심방
4. 수용포 수망굿 | 1981년 | 경북 포항시 | 아들을 잃고 바다를 향하여 울부짖는 노모


“그렇게 쌓인 자료가 17만 점입니다. 그 많은 자료 중에 전시를 위해 과연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거듭된 고민 끝에, 선생의 삶 마지막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뒤로 갈수록 ‘아, 선생은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형주 학예연구사는 전시의 주제를 ‘삶과 죽음’으로 고르고 나서 한국의 굿으로 그 범위를 좁혀갔다. 굿의 기능을 보여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을 위한 굿.


“죽음이라는 순간 뒤에는 슬픔과 위로, 작별, 치유가 따릅니다. 망자는 현세를 마무리하고 내세에서 새 삶을 맞이해야 하고, 산 사람은 다시 힘을 얻어 남은 삶을 계속 살아내야 하죠. 그런데 과연 그들은 무엇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무엇을 기원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그 전제에 굿판이 깔려있는 겁니다. 그것이 선생이 말한 ‘죽음이 곧 삶의 시작이고 삶의 끝이 죽음인 것’이라는 말과 닿아있죠. 망자를 위한 굿이지만, 결국 남겨진 이들이 슬픔에서 가벼워지는 모습까지 선생의 사진에는 담겨있습니다.”

이 전시의 흐름, 그러니까 사진을 선택한 기준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지역마다의 굿이 구분되지 않고 섞인 것에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김형주 학예연구사는 확고했다. 사진과 전시를 감상하며 웃는 사람도 있고, 우는 사람이 있듯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정답을 만들어 둔 채 그 목표를 향해 달린 작업이 아니어야 하고,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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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립, 기증, 연결고리

김수남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사진박수’다. 방울과 부채 대신 카메라를 든 무당이라고, 굿판에서 그에게 붙여준 애칭이다. 그는 굿판에서 흑립을 쓰고 있었다. 그에게 흑립은 굿판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였고, 그가 그 세계에 동화되기 위한 열쇠였다. 그가 흑립을 쓰고 그 거친 세계로 제대로 흡수되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굿’에 대한 선입견도 떨치고, 이토록 신성한 ‘안녕’을 기원하는 하나의 이벤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김수남이라는 연결고리로 우리는 생과 사의 경계를 각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1990년대 초, 황해도 큰 무당이 돌아가셔서 그 관계자분들이 우리 관에 여러 무구를 기증했어요. 무구 중에는 방울과 부채가 있었는데, 김수남 선생의 사진에 그것들이 찍혀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전시에 함께 소개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시점에 기증되었던 자료들이 2016년, 한 자리에서 만난 것입니다.”

전시장에서는 굿판의 현장을 찍은 동영상도 접할 수 있다. 이는 김수남 선생과 함께 많은 현장을 누볐던 김인회 선생이 찍은 것으로, 2014년에 기증되어 이번 전시에서 같이 소개되었다. 기증은 이런 것이다. 전시가 이런 것이다. 시간과 현장과 마음을 한데 엮어내 그 모든 것을 오늘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는 연결고리.

“김수남 선생의 아드님이 개막 인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진들이, 이렇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 온 작품들이, 그저 유족들의 손에서 잠자고 있다면 누가 세상에 김수남이라는 사진가가, 그리고 이런 문화와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겠는가’라고요.”

기증자들의 쉽지 않은 고민과 결정이 결국 이토록 많은 것에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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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신굿 | 1981년 | 제주시 구좌읍 | 부정을 물리는 서순실 심방의 가족들

 

특별전
<김수남을 말하다>

많은 사진 중 김형주 학예연구사의 마음을 흔든 사진은 바로 1981년 제주시 구좌읍에서 열린 ‘제주도 신굿’ 사진이다. 아이들이 모여 앉아있고 그 뒤에서 무녀가 굿을 하는데, 아이들도 무녀도, 사진에 담긴 사람들 모두가 활짝 웃고 있다.

“굿판이라는 데가 무척 배타적인 현장인데, 그 사진에는 그런 감정이 없어요. 모두 해맑게 웃고 있죠. 김수남 선생이기 때문에 찍을 수 있었던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선생의 경험이나 지식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잡아낼 수 있던 순간이었을 거라고요.”

김수남이 사진 안에 잡아 둔 그 순간들, 슬픔과 위로와 치유의 순간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굿의 순간들. 특별전 <김수남을 말하다>가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1에서 6월 6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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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김수남을 말하다>를 기획한 김형주 학예연구사
| 특별전 <김수남을 말하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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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 김영숙 댓글:

    고 김수남 사진작가를 만났던 기억은 83년인가 인천의 한 부둣가에서 열렸던 김금화만신의 황해도 풍어제 굿장이었습니다. 커다란 카메라를 목에 걸고 비지땀을 흘리며굿판을 누비시던 작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네요.갑작스런 타계 소식에 믿기지 않았었는데 5월6일 ‘지인들로부터 듣는 김수남의 사진인생’을 통해 고인을 추억하고 싶습니다. 가슴이 두근 두근거리네요.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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