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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시

일곱 번째, 서울에서의 봄

국립민속박물관의 정문을 들어서 조금 걷다 보면 단아한 한옥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봄을 알리는 커다란 입춘첩이 붙어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어른 걸음으로 채 스무 걸음을 걷지 않아도 한 바퀴 돌아볼 만큼 작은 마당과 옹골차게 사방을 채운 공간들, 마당 한가운데로 쏟아지는 햇볕을 가진 집. ‘오촌댁’이다. 멀리 경북의 오촌댁을 지금의 자리에 옮겨오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섭외교육과 박선주 학예연구사와 사랑받는 오촌댁이 되도록 만들어 가는 야외전시 담당자 전시운영과 김영인 학예연구사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경북 영덕에서 온 오촌댁입니다

 

박선주학예연구사_ 사람이 살지 않았던 새 집은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마당을 비롯한 우리 한옥의 구조가 온전히 담겨있는 집을 찾기 시작했죠. 현지의 지인들에게 알아봐달라 부탁하기도 하고 현장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어요. 여러 차례 발품을 팔아 운명처럼 조우한 것이 바로 이 오촌댁입니다.
 
2009년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 개선 사업에 임하면서 박선주 학예연구사는 고집을 부렸다. 박물관 마당에 절대 신축 한옥을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집이라면 모름지기 사람의 손길과 온기가, 그리고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집이다. 그냥 모양새만 집인 ‘건물’이 아니라, 진짜 ‘집’ 말이다.
 
박선주_ 오촌댁이 있던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는 영양 남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에요. 오촌댁 주인의 허락도 필요했지만, 마을 어르신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하지만 어느 어르신이 달가워하시겠어요. 마을의 구성원 하나를 뿌리째 뽑아간다는데. 그때부터 오촌댁 집주인께서 직접 어르신들을 찾아 뵙고 설득하는 긴 여정이 시작됐어요. 조마조마 했죠.
 
당시 울산에 살고 있던 집주인은, 오촌댁을 3대째 이어받은 이 집안의 아들이었다. 집주인을 포함한 자식들은 모두 출가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돌아가신 10년 전이, 오촌댁에 사람의 손길이 남아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텅 빈 집을 10년간 바라보기만 하면서 집주인은 마음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허물자니 불효자식이 되는 것만 같고, 개인적으로 복원을 하자니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고. 그저 집이 천천히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에게 국립민속박물관으로의 이건은 내심 반가운 제안이었다. 조상들에게 죄송스러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마을 어르신들을 설득했다.
 
박선주_ 10년 간 비어있던 집 치고는 구조가 완전했어요. 창문, 창호도 도둑맞지 않았고, 허리만 조금 숙이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대문도 온전했죠. 아마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보존의 가치를 잘 알고, 훌륭히 지켜냈기 때문에요. 마침내 어르신들이 허락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보다 출세했구먼, 왕이 살던 경복궁으로 들어 간다니.’라고요.
 
그렇게 오촌댁은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환송 속에 국립민속박물관 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0년 9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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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 오기 전 오촌댁의 모습. 한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북측면왼쪽과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갖고 있던 남측면가운데과 뒷면오른쪽.

 
 

나이는 올해로 169살,
남씨 집안의 3대와 함께 살았죠

 

해체작업을 하면서 집에서 나온 다양한 물품들은 차곡차곡 정리해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들어왔다. 3대가 살았던 집안의 살림살이는 아주 옛날 것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의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물건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시대의 변천사까지 한 번에 접할 수 있었다.
 
박선주_ 처음 집을 보았을 때에는 150년쯤 되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상량을 보아야만 이 집의 역사를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상량 나오기를 기다렸죠. 1848년에 지어진 집이었어요. 당시 163살, 지금은 169살 된 집이에요. 집에 사람이 살면서 지속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졌다면 충분히 문화재로도 지정될 법하죠.
 
살림살이를 다 치우고 난 뒤 오촌댁은 새로 태어나기 위해 실측에 들어갔다. 그 결과로 나온 설계도를 가져가 집안 어르신들에게 고증을 받은 뒤 수정이 가해졌고, 도면이 완성되자 본격적인 해체작업이 시작됐다. 기와를 내리고, 벽을 털어내고, 부재들을 해체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땅과 집에 살던 신에게 이제 집이 해체되고 서울로 올라갈 것이니 놀라지 말라는 고유제도 지냈다.
 
몸체를 하나하나 분리하여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온 오촌댁은, 그때부터 다시 하나하나 놓여지기 시작했다. 부재는 재사용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기존의 부재를 다시 사용했고, 썩은 부위만 동바리를 사용하여 교체하였으며 새로 들어오는 목재는 육송을 사용했다. 해체한 순서의 역순대로 차분히, 오촌댁은 다시 형태를 잡아갔다. 그리고 두 달 후, 많은 관람객에게 사랑 받는 현재의 오촌댁의 단아한 모습이 비로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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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을 다지는 것에서 시작하여 기와를 얹기까지, 오촌댁이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3D 그래픽으로 표현했다.

 

박선주_ 오촌댁에서 나온 물건들은 박물관에 도착한 후, 이건 안방에서 나왔으니 어머니의 것, 이건 사랑방에서 나왔으니 딸의 것 등 예측만 했었어요. 겨울을 지내고 봄이 왔을 때, 오촌댁의 주인인 가족들과 마을 어르신들을 초청해서 ‘오촌댁이 이렇게 자리를 잡았습니다.’하고 보여드렸어요. 그 때, 가족에게서 우리는 미처 몰랐던 수많은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어요. ‘저 한복은 내가 시집갈 때 엄마가 해 입었던 옷이야’, ‘저 이불은 제가 시집올 때 예단으로 가져온 것인데 시어머니께서 아끼느라 한 번도 안 덮으셨어요’, ‘김장을 해서 이쪽에 장독을 묻었었어’ 등등. 이거예요. 제가 집을 옮기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에요. 사람 사는 이야기요. 집이라고 하는 건 사람이 있어 존재하는 거예요.
 
오촌댁 마루 벽에는 아직도 분필로 그려진 하얀 병아리가 남아있다. 가장 마지막으로 손을 탔던 이 집 손주가 그려놓은 그림이다.

 
 

지금처럼 탈없이 잘 지내기로 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오촌댁이 터를 옮긴지 햇수로 7년 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국립민속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고 당연한 집이자, 신을 벗으면 마루까지 들어가 앉아 쉴 수 있는 다정한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오촌댁이 멀리 경북 영덕에서부터 그대로 옮겨온 집이라는 사실과 무려 200살을 바라보는 나이를 가졌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김영인학예연구사_ 관람객들은 오촌댁의 유래나 역사는 잘 모릅니다. 앞에 설명을 적어두긴 했지만, 으레 하나의 모델로 새로 만들어놓았을 거라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집을 그대로 떠서 가져온다는 것이 익숙할 리 없죠. 한옥의 경우, 살릴 수 있는 것을 가져다 다시 짓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하지만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오촌댁을 포함한 야외전시장을 담당하고 있는 김영인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일주일에 세 번 가량 청소를 하고, 수시로 물품과 집 상태를 점검한다. 집을 관리하기 위해 예전에는 아궁이에 불을 떼기도 했으나 현재는 전기를 통해 온기를 넣어주고 있다.
 
김영인_ 집은 생명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람이 안 살면, 결국 무너지죠. 하지만 오촌댁에는 들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문제 없이 잘 지내주고 있어요. 고맙고, 기쁩니다.
 
현재 오촌댁에서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주최하는 세시풍속이나 절기 등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입춘이면 ‘입춘대길’이라고 쓴 입춘첩을 붙이기도 하고, 설에는 차례도 지내며 동짓날에는 팥죽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민속을 체험하는 공간으로서 오촌댁만 한 곳이 없다.
 
김영인_ 평소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편이지만, 절기나 명절에는 국내 관람객이 훨씬 많아요. 행사 참가 신청을 받으면 정원의 10배가 넘는 인원이 지원하기도 하죠. 이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전통행사이기 때문일 거예요. 국립민속박물관이 이렇게 활발하게 세시 행사를 열 수 있는 것은, 오촌댁이 이렇게 든든히 자리를 지켜주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관람객들이 찾아와 마루에 신을 벗고 올라앉아 땀을 식힌다. 금방이라도 오촌댁이 부엌에서 물 한 사발을 떠 들고 나올 것만 같다. 마치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하다. 어쩌면 땅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을지도 모를 오촌댁. 멍들고 상한 곳을 어루만져 보듬고, 냉기 맴돌던 네모난 마당에 사람의 온기를 채워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7년간 탈없이 있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돌아 나오는 대문간에 두 손 곱게 모은 오촌댁이 우리를 배웅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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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오촌댁을 지키는 김영인 학예연구사와 오촌댁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박선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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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영상_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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