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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시대와 음악 사이

음악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이 작업을 해야 할까. 이 질문에서 이 인터뷰는 시작됐다. 음악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절이 담겨있고, 또 그 음악으로 하여금 우리의 추억도 덧입혀지게 된다. 문화의 한 장르이고, 시대를 그려내는 그림이자 개인의 사담이 이어 붙은 이 음악이라는 것, 대체 누가 기록해야 하는 걸까. 작곡가 윤일상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와 문화, 음악을 아우를 수 있는 이가 기록해야 한다’고.

 
 

노래, 시대가 담긴 그릇

서정주의 시를 읽는다. 시를 읽는 방법은 학교에서 배웠다. 배우는 방식이 어떠했든, 가슴에는 저마다 다르게 박혔다. 문학은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곤 하지만, 책으로, 문장으로 늘 우리 곁 가까이에 존재한다. 음악은 어떨까. 사람들은 목청껏 애창곡을 부르지만, 좀처럼 기록되는 일이 없다. 입술을 타고 흘러나와 공중으로 흩어진다.

 

“음악은 문화이기 때문에 시대 정신을 반영할 수밖에 없죠. 지금 나의 연가가 암울한 시대에는 분명 다르게 해석될 거예요. 이 곡이 사람들에게 불려졌던 때의 상황들을 뒷받침할만한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사연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 민속의 역할인 것 같고요.”

 

아주 옛날, 떠난 임을 야속해하며 부르던 ‘아리랑’, 전쟁통에서 손을 놓친 가족을 애타게 찾는 ‘잃어버린 30년’, 젊은이들의 뜨거운 정의가 담긴 ‘아침이슬’,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로하던 ‘컴백홈’, 온 세계가 들끓던 붉은 물결 속 ‘오 필승코리아’까지. 우리가 살아온 시대에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노래들이 있어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이 먼 과거가 될 미래에는 이 노래들을 어떻게 접하고, 또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후배들에게 ’미래 음악이 궁금하다면 30년 전 음악을 들어보라’고 해요. 음악은 일정 주기를 두고 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음반’이라는 매체 외에 다른 기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곡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겠죠. 만일 그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하게 된다면 음악을, 음악산업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기초적인 음악 지식을 바탕에 두고, 줄기와 맥락을 이해하는 사람이요.”

 

워낙 여러 분야에서 음악을 연구하는 지금의 구조로는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맥락은 알지 못한 채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겉핥기식 기록만 남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사회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야 해요. 그 친구의 생각이 시대를 반영하는 결과물로 남기 때문이에요. 그런 입장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다 보면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죠. 그래서 수많은 갈래의 이야기를 듣고, 만나야 해요. 인디씬, 락, 오버그라운드, 작사, 작곡 등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기록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것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필요하다.

 
 

저작권, 또 하나의 기록법

“길을 걷다 후진하는 차에서 흘러나오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게 됐어요.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2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노래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전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제가 만든 곡도 그 어떤 차의 후진음이라도 좋으니 200년 뒤에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그의 순수한 바람은 사실, 창작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소망이기도 하다. 그러려면 200년, 아니 그 이상 음악이 버틸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로운 이가 많지 않다. 윤일상은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대신할 방법으로 ‘저작권’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녹록지 않다.

 

“현재 활동 중인 음악가 중 절반이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음반 제작자도 상황은 마찬가지죠. 저작권법에 관심이 있거나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어요. 안타까운 상황이죠. 저작권 보호는 결국 음악의 확실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고, 이것이 쌓여 역사가 될 것이고, 결국 음악계의 발전으로 이어질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는 기초적인 생활도 보장되지 않는 사회적 여건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분야마다 합리적인 배분이 필요하건만, 왜곡된 현상, 불균형이 낳은 불합리는 음악가의 권리를 낮게 책정한다. 주린 배로 노래만 부르기도 벅찬 음악가들은 결국 삶에 매몰된다. 시대를 멜로디로 그려낼 사람들이 자꾸만 꺾인다. 그런 창작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는 꾸준히 애쓰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우리나라는 참 빠르죠. 동반되어야 할 의식이나 환경이 함께 속도를 내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더 마음 편히 상상력을 키워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은 그의 마음이 와 닿았다. 내 노래가 200년 후에도 들려졌으면 하는 창작자들의 소망. 바람직한 저작권 확립과 더불어 촘촘한 기록에 그 열쇠가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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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정체성을 지키는 사람들

작곡가 데뷔 25년. 그를 대표하는 곡은 수없이 많지만 그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해준 곡은 바로 1996년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영턱스클럽의 ‘정’이다. 당시 젊은 세대들이 즐겨 듣던 대중가요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던 전통가요트로트 풍의 멜로디가 접목된 독특한 분위기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한때는 미국의 저메인 듀프리Jermain Dupri를 경쟁자로 삼으며 빌보드를 정복하겠다는 꿈을 꿨는데, 문득 ‘아, 그와 나는 뿌리부터 다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한국인의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할머니가 들었던 음악, 그 정서를 잃지 말자는 생각으로 영턱스클럽의 ‘정’을 만들었어요.”

 

‘정’은 90년대 댄스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재생산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어쩐지 자신의 책임도 있는 것 같아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이 쓰리다고 했다. 전통가요를 찾아 듣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더 성장하면, 결국 전통가요는 사라지고 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저는 음악인을 믿어요.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조용필 선배님의 음악은 여전히 건재하잖아요. 음악인이자 창작자로서 멈춰있다는 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데, 지금 우리는 살아있거든요.”

 

우리는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 음악을 찾아 듣지만, 정작 음악을 기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 노래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그 시대에 왜 그 노래가 필요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태어나고 있는 이 많은 음악들을, 조금의 관심과 조금의 노력을 보태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멜로디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해주는 음악인들에 대한 보답이자 미래에서 오늘을 궁금해 할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 테니.

 

윤일상 작곡가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4살 때 피아노를, 6살 때 첫 작곡을 시작했다. 1992년 박준희의 ‘Oh boy’로 데뷔. Mr2의 ‘난 단지 나일 뿐’, DJ DOC의 ‘겨울이야기’ 등으로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영턱스클럽의 ‘정’으로 ‘한국형 댄스 음악’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90년대 음악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김범수의 ‘보고싶다’, 윤도현밴드의 ‘잊을게’,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 이은미의 ‘애인있어요’, 쿨의 ‘운명’, ‘애상’, 터보의 ‘회상’ 등 대중에게 사랑받는 곡들을 작곡했다. 현재 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음악에 담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글_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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